FC 바르셀로나

 




[image]
'''FC 바르셀로나'''
'''F.C. Barcelona'''
'''정식 명칭'''
<colcolor=black>Futbol Club Barcelona
'''애칭'''
'''블라우그라나 (Blaugrana)''' , '''아술그라나스(Azulgranas)'''
'''꾸레 (Culés)'''[1]
바르셀로니스타스 (Barcelonistas)
'''창단'''
1899년 11월 29일
'''구단 형태'''
시민구단[2]
'''소속 리그'''
라리가 (La Liga)
'''연고지'''
바르셀로나 (Barcelona)
'''홈 구장'''
캄 노우 (Camp Nou, 99,354명 수용 가능)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 CF - 엘 클라시코
RCD 에스파뇰 - 데르비 바르셀루니
'''감독'''
[image] 로날트 쿠만 (Ronald Koeman)
'''주장'''
[image] 리오넬 메시 (Lionel Messi)
'''부주장'''
[image] 세르지오 부스케츠 (Sergio Busquets)[3]
'''공식 웹 사이트 & 소셜 미디어'''

'''공식 유니폼 구매 사이트'''
[4]
'''대한민국 팬 사이트'''

'''우승 기록 '''
'''라리가 (1부)'''
(26회)
1928-29, 1944-45, 1947-48, 1948-49, 1951-52, 1952-53, 1958-59, 1959-60, 1973-74, 1984-85,
1990-91, 1991-92, 1992-93, 1993-94, 1997-98, 1998-99, 2004-05, 2005-06, 2008-09, 2009-10,
2010-11, 2012-13, 2014-15, 2015-16, 2017-18, 2018-19
'''코파 델 레이'''
(30회 / 최다 우승)
1909-10, 1911-12, 1912-13, 1919-20, 1921-22, 1924-25, 1925-26, 1927-28, 1941-42, 1950-51,
1951-52, 1952-53, 1956-57, 1958-59, 1962-63, 1967-68, 1970-71, 1977-78, 1980-81, 1982-83,
1987-88, 1989-90, 1996-97, 1997-98, 2008-09, 2011-12, 2014-15, 2015-16, 2016-17, 2017-18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3회 / 최다 우승)
1983, 1991, 1992, 1994, 1996, 2005, 2006, 2009, 2010, 2011, 2013, 2016, 2018
'''코파 에바 두아르테'''[5]
(3회 / 최다 우승)
1948, 1952, 1953
'''코파 데 라 리가'''[6]
(2회 / 최다 우승)
1982-83, 1985-86
'''UEFA 챔피언스 리그'''
(5회)
1991-92, 2005-06, 2008-09, 2010-11, 2014-15
'''UEFA 컵 위너스컵'''
(4회 / 최다 우승)
1978-79, 1981-82, 1988-89, 1996-97
'''인터-시티 페어스컵'''
(3회 / 최다 우승)
1955-58, 1958-60, 1965-66
'''UEFA 슈퍼컵'''
(5회 / 최다 우승)
1992, 1997, 2009, 2011, 2015
'''FIFA 클럽 월드컵'''
(3회)
2009, 2011, 2015
'''클럽 운영진 '''
'''회장'''
[image] 카를레스 투스케츠 (Carles Tusquets)[7]
'''부회장'''
[image] 조안 라몬 (Joan Ramon)
'''클럽 회계사'''
[image] 조안 루이스 가르시아 (Joan Lluís Garcia)
'''클럽 총무'''
[image] 주제프 마리아 미르 (Josep Maria Mir)
'''보드진'''
[image] 미켈 야도 카사데발 (Miquel Lladó Casadevall)
[image] 주제프 마리아 세르카빈스 (Josep Maria Xercavins)
[image] 알렉스 틴토레 (Àlex Tintoré)
'''감독'''
[image] 로날트 쿠만 (Ronald Koeman)
'''수석 코치'''
[image] 알프러트 스뢰더르 (Alfred Schreuder)
'''부수석 코치'''
[image] 헨리크 라르손 (Henrik Larsson)
'''유스 풋볼 디렉터'''
[image]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Patrick Kluivert)
'''클럽 앰버서더'''
[image] 호나우지뉴 (Ronaldinho)
[image] 히바우두 (Rivaldo)
[image] 에리크 아비달 (Éric Abidal)
[image] 줄리아누 벨레티 (Juliano Belletti)
'''클럽 명예의 전당'''
[image] 티토 빌라노바 (Tito Vilanova)
1. 개요
2. 상세
3. 스쿼드
3.1. 팀 주축 멤버
3.2. 이적에 대하여
4. 홈구장 - 캄 노우
6. FC 바르셀로나 파트너
6.1. 메인 파트너
6.2. 글로벌 파트너
6.3. 오피셜 파트너
7. Cant del Barça
9. 클럽 기록[8]
9.1. 출장 기록
9.2. 공격 포인트 기록
9.3. 골키퍼 기록
9.4. 수상 기록
9.5. 기타 기록
10. 경기 스타일
10.1. 전술에 관하여
11. 라이벌
12. 구단 산하
13. FC 바르셀로나에 대한 말말말
14. 여담
14.1. 바르셀로나의 아시아 선수
15. 논란거리
15.2. 카탈루냐 독립 경우 따른 구단의 미래
15.3. 파브레가스를 둘러싼 논란
15.4. K리그 올스타와의 친선전
15.4.1. 수원과의 친선전
15.5. 유소년 영입에 관한 징계
15.6. 주요 선수들의 탈세 논란
15.7. #WeAreAllLeoMessi 캠페인 논란
16. 둘러보기


1. 개요


'''MÉS QUE'''
'''UN CLUB'''
스페인 라리가의 프로 축구 클럽. 연고지는 바르셀로나. 홈 구장은 캄 노우.
초대 라리가에서 우승한 이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 CF에 이어 2번째로 많은 라리가 우승을 기록했고, 1928년 라리가 출범 이래 단 한 번도 강등되지 않고 스페인 최상위 리그에서 뛰고 있는 전통의 명문구단이다. 특히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최초의 한 해 6관왕[9]과 최초의 트레블 2회[10]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11][12]
약칭은 바르사(Barça). 그러나 한국에서는 흔히 '바르샤'라 부르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다.[13]

2. 상세


바르셀로나 현지에선 그 위상이 거의 종교 수준이다. 괜히 모토가 '클럽 그 이상'이 아닌 셈. # 스페인 내전 시기부터 이어진 역사적 풍파와 혼돈을 바르셀로나 시민과 함께 거쳐온 클럽이기 때문에 지역 열성팬들의 팀 충성도가 굉장히 높다. 물론 2000년대 후반부터 보여준 끝판왕 포스를 보고 급유입된 각국의 철새팬들도 매우 많은 편. 챔피언스 리그 첫 우승은 1992년으로 명성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편이지만 2006년 두 번째 우승 이후 빅 이어만 3차례나 들어올렸다.
리누스 미헬스가 창시하고 요한 크루이프가 구현한 토탈 풋볼을 바탕으로 좁은 공수간격을 통해 짧은 패스를 이용한 '티키타카' 전술을 사용하여, 2008~2012년까지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 중 하나라는 데에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있었다. 특히나 2010-11 시즌 강팀, 약팀 가리지않고 만나는 팀들마다 반코트 경기를 시전하고는 했다. 그 대표적인 경기가 엘클라시코 5:0 대승.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의 바르셀로나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며 아리고 사키의 '밀란 왕조'가 끝난 뒤, 곧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10여년 간 이어진 춘추전국시대를 깨고 유럽 축구의 헤게모니를 구축한 클럽 중 하나로서 유럽 축구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왕조 중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2005-06~2014-15 시즌까지 10년간 챔스 4회 우승, 리그 6회 우승(평균 승점 85), 코파 델 레이 3회 우승, 두 번의 트레블과 2009년 6관왕 등, 전 유럽 축구사를 통틀어 이만한 업적을 이룩한 왕조를 뽑아보자면, 1950-60년대 유럽을 주름잡았던 <저승사자 군단> 레알 왕조, 1970년대 초반의 <토탈 풋볼> 아약스 왕조, 1970년대 중반의 <카이저의 팀> 바이에른 왕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순까지의 <붉은 제국> 리버풀 왕조,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사키 혁명> 밀란 왕조 만이 이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은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를 "내 생애 최고의 팀"이라고 꼽았으며, 아르센 벵거 전 아스날 감독도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를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팀"이라고 표현했다.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가 타팀 감독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까닭은 단순히 강하다거나, 우아한 축구를 구사한다거나, 우승컵을 왕창 쓸어담아서가 아니다. 팀의 주요 선수[14]들을 여기저기서 사모으는 것이 아닌, 유스 때부터 스스로 착착 키워 올려 엄청난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즉, 평범한 게이머부터 실제 축구계 관계자들마저 한 번쯤은 꿈꿔보지만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르셀로나 만한 축구 기반이나 철학, 시간 투자는 하지도 않은 채 저 엄청난 이상에 혹해서 어중이떠중이로 대충 점유율 축구 흉내만 내다가 폭망한 팀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바르셀로나 자신도 이 꿈의 세대 이후 대체자들을 찾지 못해 전성기에서 내려왔다. 사실, 라 마시아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월드클래스 선수들을 영원히 자체조달 할 순 없다. 바르셀로나의 하락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빛이 워낙 강렬했던 만큼, 꿈의 세대 노화 후 그 그림자도 짙어져버린 셈.
창단 모토는 '''클럽 그 이상'''(Més que un club).[15] 이 클럽의 또 다른 특이사항으로는 '''세계 최초로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축구 클럽이라는 것.''' 일종의 시민구단이라고 보면 된다. 박물관 2층 입구에도 '바르사의 주인은 조합원'이라고 새겨 놓았을 정도다.
그래서, FC 바르셀로나는 구단주가 구단을 창설하면 그에 맞춰서 팬들이 생겨나는 방식이 아니라, 축구팬들이 자발적으로 자본을 출자하여 구단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구단의 회장까지도 6년마다 한 번씩 팬들의 투표를 통해서 선출한다. 투표권이 주어지는 자격은 가입 경력 1년 이상, 18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6년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 클럽 회장 선거에서 투표를 행사하면서 회장을 선출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단, 회장 출마는 카탈루냐인만 가능하다.
팀의 유니폼 색깔은 클럽의 창시자 조안 감페르[16]가 스위스인[17]이라서 스위스의 명문 클럽 FC 바젤을 참고한 것[18]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르사의 지위가 높아지자 FC 바젤 팬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클럽이 바르사를 따라했다며 클럽을 욕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 붉은 색과 푸른 색을 사용한 유니폼에서 유래한 별명이 블라우그라나 (Blaugrana)인데, 카탈루냐어로 블라우가 파란색이고 그라나가 선홍색이다.
엠블렘 변천
바르셀로나 시기
앰블럼에 카탈루냐 기 문양과 함께 잉글랜드 기 문양과 동일한 성 게오르기우스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잉글랜드와는 무관하다. 성 게오르기우스(카탈루냐어로 St. Jordi)는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으로 바르셀로나 시 깃발에 카탈루냐 기와 함께 성 게오르기우스 십자가가 들어가 있다. 즉, FC 바르셀로나의 엠블럼은 바르셀로나 시 깃발을 차용한 것이다.[19]
더불어 이 팀 이름 그대로 여러 다른 종목팀들이 종합 스포츠단을 형성하고 있다. 농구팀, 배구팀, 레슬링에서 장애인 스포츠팀까지 골고루 같은 이름을 가진 팀들이 있는데 이는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도 그렇다. 농구팀도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강호이다. 2009년 유로 농구 챔피언스 리그도 우승했으며, 리가 ACB도 우승했다. 유니폼도 축구와 똑같은 색상을 쓰며, 기묘하게도 농구 클럽임에도 FC 바르셀로나라는 이름을 쓴다. 아마도 축구 클럽이라는 명칭보단 아예 구단 전체 이름을 상징하는 듯 싶다.[20]

3. 스쿼드




3.1. 팀 주축 멤버


'''라 마시아'''[21]를 통해 육성한 선수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바르셀로나 소속이 아니더라도 라 마시아 출신 유명 선수들로는 대표적으로 최전성기로 알려져 있는 펩 과르디올라 재임 시기부터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준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차비 에르난데스, 제라르 피케, 세르지오 부스케츠 등이 있고, 이들 모두 이미 10년 넘게 바르셀로나 1군에서 활약하며 전 세계에서 최상위급 퍼포먼스를 보였던 선수들이다. 또한 세르지 로베르토 선수 역시 포지션 변경으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으며 카를레스 알레냐도 2018-19 시즌부터 정식 1군으로써 차차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또한 이적을 통하여 영입된 루이스 수아레스, 이반 라키티치, 마르크안드레 테어슈테겐, 조르디 알바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바르셀로나의 주축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과르디올라 시기까지만 해도 라 마시아에서 많은 선수들을 콜업하여 사용했지만 루이스 엔리케, 에르네스토 발베르데, 키케 세티엔을 거쳐오면서 라 마시아를 콜업하여 사용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우스만 뎀벨레, 프렝키 더용, 클레망 랑글레, 필리페 쿠티뉴, 앙투안 그리즈만 등과 같이 타 클럽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을 영입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많은 팬들이 아쉬운 감정을 나타냈다.
하지만 2020-21 시즌, 로날트 쿠만 감독이 부임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많은 노장 선수들을 과감하게 방출하고 라 마시아 출신 선수들로 그 공백을 매웠다. 안수 파티, 리키 푸치, 로날드 아라우호와 같이 FC 바르셀로나 B에서 충분한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을 정식 1군으로 등록하였으며 페드리, 마테우스 페르난지스와 같이 바르사 B 소속으로 임대를 갔다 온 선수들도 1군에 등록시키면서 과르디올라 시절에도 없었던 기록, 단일 이적 시장에서 5명의 유소년 선수들을 한 번에 콜업시키는 기록을 달성하였다.

3.2. 이적에 대하여


세계 최고의 팀답게 매년 많은 돈을 선수 이적에 사용하는데, 일단 팀의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는 이적료가 너무 비싸 농기계로 등록해서 영입했으며[22] 최근만 계산하면 루이스 엔리케 100억, 세이두 케이타 200억, 다니 아우베스 600억, 다비드 비야 600억, 아드리아누 코헤이아 200억, 막스웰 100억, 케이리송 200억, 마르틴 카세레스 300억, 드미트로 치그린스키 400억,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1024억, 네이마르 주니오르 1273억 이후 매년 1000억씩 지출했다.[23]
유스 출신을 제외하고 보면, 다비드 비야라는 걸출한 스페인 최고의 공격수가 있었고, 알베스는 마이콘필립 람과 같이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라이트백이었으며 마이콘의 기량이 떨어진 이후로는 필립 람과 함께 최고의 라이트백이라고 볼 수 있는 선수였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정상급 수비형 미드필더였고 이외에도 에리크 아비달, 세이두 케이타, 아드리아누 코헤이아 같은 선수들이 1군에 있었다.
2010-11 이적 시장에서 바르셀로나가 다비드 비야의 영입을 발표하고 야야 투레를 25M으로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시켰다. 스페인의 경제난과 더불어 바르셀로나 임원진들이 공금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등 재정난이 심각해짐에 따라 주급 많이 받는 티에리 앙리를 방출하고, 치그린스키를 사올 때보다 더 싼 값에 돌려보냈으며[24] 라파엘 마르케즈도 MLS로 이적이 완료됐다. 수비에서는 세비야의 풀백 아드리아누 코헤이아를 영입했다. 아드리아누가 양쪽 풀백이 모두 가능해서 알베스의 서브, 아비달의 노쇠화를 대비한 왼쪽 풀백을 갖추는데 성공했지만 수비형 미드필더와 수비진의 약화가 문제로 지적받는다. 수비형 미드필더는 세르지오 부스케츠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를 영입해 무게감을 더하였다.[25]
2011-12 시즌을 두고 우디네세 칼초에서 활약하던 칠레 출신의 알렉시스 산체스와 라 마시아에서 발굴했지만 아스날 FC로 떠났던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영입했다. 2012년 1월 12일 막스웰을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시켰다.
2013-14 시즌 차비의 노쇠화와 메시 의존증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진 바르셀로나는 야심차게 브라질의 슈퍼 라이징 스타인 네이마르 주니오르를 데리고 오게된다. 하지만 이적 당시 이적료는 공식적으로 700억 원.
2014-15 시즌 바르셀로나는 2009년부터 유소년 영입 규제[26]를 어긴 혐의로 FIFA에 의해 1년간 선수 영입을 금지당했으며, 이에 대해 항소를 했으나 기각되는 바람에 2014년 바르셀로나의 여름 이적시장은 바빠질 수 밖에 없었다. 2013-14 시즌 리버풀에서 특급 활약을 한 루이스 수아레스를 1024억 원에 영입하고 차비 에르난데스의 노쇠화로 인해 세비야에서 항상 높게 평가 받아오던 패서인 이반 라키티치를 275억 원에 데려오고 수비의 안정감을 더하기 위해 제레미 마티외 등을 276억 원에 영입.[27] 여기에 독일 최고의 골키퍼 유망주인 마르크-안드레 테어 슈테겐과 라 리가에서 항상 꾸준한 활약을 보여줬던 클라우디오 브라보도 있다.[28]
2017-18 시즌에는 메시와 호날두를 이을 신계 후보자 네이마르 주니오르PSG이 222M 바이아웃으로 영입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만 했다.[29]
주축 선수의 방출과 감독 교체라는 뒤숭숭한 상황을 뒤로하고 중국에서 뛰던 파울리뉴를 40M에 영입했으며 제2의 부스케츠라고 불리는 세르지 삼페르를 임대를 보냈다. 또한 2선 자원을 영입하기 위하여 필리페 쿠티뉴를 강력하게 원했지만, 리버풀 구단에서는 NFS를 선언해버려서 이적에 실패했다.
도르트문트로부터 우스만 뎀벨레를 1억 500만 유로(약 1395억 원)에 4000만 유로(약 531억 원)의 옵션이 더해져 총액 1억 4500만 유로(약 1927억 원)에 계약했다.
겨울 이적시장에는 여름 이적시장에 리버풀이 판매 불가를 선언했던 필리페 쿠티뉴가 결국 1억 4000만 유로, 한화 약 1900억 원으로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네이마르 주니오르, 킬리앙 음바페에 이어 세계 이적료 3위를 기록했다. 바르셀로나의 영원한 지우개,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는 노쇠함에 따라 허베이 화샤 싱푸로 이적했다.
최근의 행보를 보면 알겠지만 계속되는 영입 실패와 기존 선수들을 놓치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바르셀로나의 보드진 탓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30] 영입 시도시 선수 개인과 접촉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로 인해서 해당 구단과 관계가 나빠지고 제소도 여러 번 당하기도 했다.[31] 그 외에도 협상 기술이 최악이라 쿠티뉴의 영입 당시 이적료 5년 분할 지급에 부가 조항으로 발롱도르 수상과 챔스 우승, 2개 대회 우승 같은 무리한 조건들을 넣었다가 지역지인 리버풀 에코에게 쿠티뉴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달을 걸어다니는 업적을 세우면 옵션을 받을 수 있다며 조롱당하기도 했다.[32] 리버풀은 여름 이적시장 내내 NFS을 선언했고, 그 결과 바르셀로나는 애당초 목표했던 금액을 훨씬 뛰어넘는 돈을 지불하고서야 겨울에 데리고 올 수 있었다.[33] 그 결과 유스 시스템과 영입 모두에서 실패를 낳고 있으며, 현 보드진에 대한 비판이 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특히 실패한 이적 중에서는 수비수의 사례가 더 많은데,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사뮈엘 움티티, 토마스 베르마엘렌, 제레미 마티외 등의 중앙 수비수 이적생들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나이가 많거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선수를 원금 이상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있는데, 파울리뉴광저우 헝다 타오바오에서 40M에 데려와 잘 써먹은 뒤 50M에 다시 중국으로 팔았으며, 예리 미나를 11.8M에 대려와서 고작 두 경기[34]만 뛰고 31.5M에 에버튼 FC로 팔아버리거나[35] 마우콩 시우바를 41M에 영입해서 지지부진한 활약에도 40M+5M에 향후 이적료의 20%를 바르사에 줘야하는 옵션까지 붙은 채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적시켰다.
특이점으로 재능있는 브라질 선수들을 상당히 선호하는 편이다. 당장 바르셀로나를 거쳐간 브라질 선수들은 30명이 넘으며, 그중에서도 호마리우,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나우지뉴 같은 브라질 스타들은 바르셀로나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 최근에도 네이마르 주니오르, 필리페 쿠티뉴 같은 선수들 영입에 거액을 투자하는가 하면, 아르투르 멜루, 마우콩 시우바 같은 신성들을 영입하는 등 브라질 선수들을 꾸준히 영입하고 있다.
요한 크루이프 이후로 AFC 아약스 경험이 있는 선수들을 많이 영입하는 편이다. 요한 크루이프가 심어 놓은 축구 철학이 비슷해서 그런 듯하다. 최근의 아약스 출신 선수 영입 사례 중에 가장 잘 된 케이스로는 루이스 수아레스, 프렝키 더용이 있다. 한술 더 떠서 아약스 출신 감독도 많이 영입하는데 요한 크루이프, 루이 판 할, 프랑크 레이카르트, 로날드 쿠만이 대표적인 아약스 경험이 있는 바르셀로나 감독이다.
2019-20 시즌에는 2018-2019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 4강 돌풍을 일으켰던 AFC 아약스의 젊은 미드필더 프랭키 더용을 조기에 영입하여 미드필더진의 노쇠화에 대비했다. 그런데 시즌 말에 구단 재정 때문에 아르투르 멜루미랄렘 퍄니치와 트레이드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36] 그리고 실제로도 트레이드가 이뤄지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2020-21 시즌 여름 이적 시장에 페드리[37], 프란시스쿠 트링캉, 세르지뇨 데스트를 영입하며 나름 알차게 보냈다.

4. 홈구장 - 캄 노우


'''캄 노우''' '''(Camp Nou)'''
'''Futbol Club''' '''Barcelona'''
'''캄 노우 전경'''
'''원어명'''
L'Estadi
'''개장'''
1957년 9월 24일
'''소재지'''
스페인 카탈루냐바르셀로나
'''규격'''
105m × 68m
'''좌석수'''
99,354석
'''운영'''
FC 바르셀로나

홈구장은 캄프 누이며 유럽에서 가장 큰 축구 경기장이며, 세계에서 11번째로 큰 경기장이다. 그리고 인기팀답게 유럽 최고 수준의 평균 관중을 자랑하는 팀이다. 16/17 시즌 한 경기 평균 77,944명의 관중을 동원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79,635명)에 이어 2위에 올랐다. 관중 대부분은 연간 회원권을 가진 사람들이고 회원권을 사기 위해 대기한 사람만 수만명에 달하기에 1년간 회원권을 대여하는 경우도 있는데 1만 유로(약 1400만원)를 호가하는 가격에도 원하는 사람이 줄을 설 정도라고 한다. '''바르셀로나는 홈에서 정말 강한 팀이다.'''


5. 유니폼




6. FC 바르셀로나 파트너



6.1. 메인 파트너


'''FC 바르셀로나 메인 파트너'''
'''나이키'''
'''라쿠텐'''
'''유니세프'''[38]
'''BE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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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글로벌 파트너


'''FC 바르셀로나 글로벌 파트너'''
'''1X BET'''
'''에스트레야 담'''
'''코나미'''
'''쿠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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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PO'''
'''스탠리 블랙 & 데커'''
'''게토레이'''
'''F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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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브라운'''
'''칠리즈'''
'''F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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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오피셜 파트너


'''FC 바르셀로나 오피셜 파트너'''
'''어시스텐시아 사니타리아'''
'''알리안츠'''
'''SK 루브리컨츠 ZIC'''
'''스코티아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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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 바이야오'''
'''코카콜라'''
'''라크 은행'''
'''차이나 타이핑 생명 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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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샤 은행'''
'''메이 은행'''
'''SHB'''
'''세방 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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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 & 숄더'''
'''니치반'''
'''BMG 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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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ant del Barça




'''FC 바르셀로나 공식 응원가 Cant del Barça'''
'''경기 시작 전 캄 노우에서의 응원'''[39]
작사: '''Jaume Picas'''(하우메 피카스), '''Josep Maria Espinàs'''(호셉 마리아 에스피나스)
작곡: '''Manuel Valls'''(마누엘 발스) 코러스: '''Coral sant Jordi'''(코랄 산 조르디)[40]
'''Tot el camp
És un clam
Som la gent blaugrana
Tant se val d'on venim Si del sud o del nord
Ara estem d'acord estem d'acord
Una bandera ens agermana.

Blaugrana al vent
Un crit valent
Tenim un nom el sap tothom:
Barça, Barça, Barça!

Jugadors
Seguidors
Tots units fem força
Són molts anys plens d'afanys
Són molts gols que hem cridat.
I s'ha demostrat s'ha demostrat
Que mai ningú no ens podrà tòrcer.

Blaugrana al vent
Un crit valent
Tenim un nom el sap tothom:
Barça, Barça, Barça!
'''
'''온 경기장이
사람들로 가득차 있네
우리는 블라우그라나의 서포터
우리의 출신이 남쪽이든 북쪽이든 그건 중요치 않아
우리 모두 하나되어
형제애로써 바르셀로나 깃발 아래 뭉친다.

블라우그라나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용맹스런 함성이 울려퍼진다
모두가 알고있는 그 이름:
바르사, 바르사, 바르사!

선수들이여
서포터들이여
우리는 최강으로 하나가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많은 것을 이룩했고
수많은 골들을 작렬시켰다
또한 우리는 보이고 또 보여줘왔다.
그 어떤이도 우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블라우그라나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용맹스런 함성이 울려퍼진다
모두가 알고있는 그 이름:
바르사, 바르사, 바르사!
'''
FC 바르셀로나의 공식 응원가로써 팀의 창단 75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이 응원가는 1974년 11월 27일, 캄프 누에서 열린 FC 바르셀로나와 동독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처음 울려퍼졌다. 다른 응원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스페인어가 아닌 카탈루냐어 , 즉 바르셀로나 자치주정부 언어를 사용하여 작사되었다는 점이다. 응원가의 명칭인 '''Cant del Barça'''[41] 을 해석하자면 '''바르사의 노래'''가 된다. 다른 명칭으로 Himno del F.C. Barcelona라고도 하는데 이 것 역시 해석하자면 바르셀로나의 찬가 정도로 해석된다. 여느 팀과 똑같이 캄프 누 홈 경기에서 경기 시작 전과 종료 후에 울려펴진다. 자주심이 강한 카탈루냐인들의 굳은 의지가 잘 표현되어있으며 카탈루냐 인들의 정신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축구팀 FC 바르셀로나만의 응원가라 할 수 있다.

8. 역사




9. 클럽 기록[42]



9.1. 출장 기록



9.2. 공격 포인트 기록



9.3. 골키퍼 기록



9.4. 수상 기록



9.5. 기타 기록



10. 경기 스타일


'''전세계를 경악시킨 티키타카'''
'''엄청난 조직력의 프리킥 오프사이드 트랩'''
FC 바르셀로나는 2011년 초반 자타공인 최강팀으로 꼽혔었다. 심지어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2011년의 바르셀로나는 역대급으로 꼽힐만한 팀인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으며, 전문가들은 일반 축구 팬들의 평가보다 더 높은 평가를 내렸다. 마르코 판바스턴도 2011년의 바르셀로나를 자신이 이끈 밀란 제너레이션보다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바르셀로나의 팀 스타일은 매우 독특하다. 그 특징을 얘기하자면, '''빠르고 정확한 패스, 강렬한 전방 압박, 극도의 점유율'''로 나타낼 수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확실한 전술 철학을 보유한 점유율 축구 대명사이다. 엄청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미칠듯한 패스 워크와 그 패스 워크를 바탕으로 한 압도적인 점유율. 그리고 점유율 축구 특유의 아주 느려 보이는 템포에서 송곳처럼 터져 나오는 빠른 템포라 하겠다. 보통 어지간한 실력 차이가 나는 팀이라도 점유율이 6:4 이상으로 넘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바르셀로나의 경우는 7:3 이상의 점유율을 가지는 경우마저도 흔할 정도로 독보적인 점유율 축구를 구사한다. 이렇게 점유율이 높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센터백들이 모두 하프 라인 부근까지 올라가 공을 돌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강렬한 압박, 골키퍼를 제외한 선수 전원이 센터 서클 앞으로 전진하는 수준의 토탈 풋볼, 화려한 드리블러와 뛰어난 파괴력을 지닌 양 쪽 풀백들의 오버래핑을 통한 공간 창출과 돌파, 그로 인해 생기는 공간에 대한 킬 패스, 공격수는 물론이고 미드필더, 수비수들까지 끝없이 선수 간의 포메이션을 바꿔가며 바르셀로나의 전술을 완성해 나갔다.
이런 전술로 인해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모두 뛰어난 발 기술을 요구받는다. 바르셀로나는 빌드업을 골키퍼에서 부터 시작하기에 골키퍼 역시 발 기술이 좋아야 한다. 또한, 위에서 말했 듯이 대부분의 선수들은 모두 하프 라인을 넘어서 있기에 센터백들과 골키퍼와의 거리가 넓기에 골키퍼가 종종 드리블을 해서 상당히 전진된 위치까지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프 라인의 수비수들은 공격 방향을 바꾸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만약 오른쪽을 공략하고 있는데 잘되지 않을 경우에는, 코너 플래그 근처라 할지라도 선수들은 공을 돌려 센터 서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센터백들에게 패스를 한다. 이 센터백들은 순식간에 경기장의 왼쪽으로 패스를 주고, 방금까지 오른쪽으로 쏠려있던 상대팀 선수들은 잠시 동안 왼쪽 부근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다른 팀들의 경우, 센터백들은 페널티 박스 부근에 있기에 이 동작을 시도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하프 라인 넘어서 있는 선수가 비교적 적을 것이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센터백들이 높이 자리 잡고 있고, 이 덕분에 나머지 선수들이 대부분 상대팀 골문 근처에 포진해 있을 수 있다. 빌드업 시, 바르사는 3백에서부터 빌드업을 시작한다. 두명의 센터백들은 경기장 측면으로 빠지고, 중앙에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자리잡는다. 이로서 윙백들은 오버래핑을 위해 좀 더 전진해 있을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가장 잘 수행했던 4명의 선수를 고르자면 수비형 미드필더에 세르지오 부스케츠, 센터백카를레스 푸욜제라르 피케, 그리고 푸욜이 은퇴한 후 바르사의 2번째 전성기에 이 역할을 수행했던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있다.
이러한 축구 스타일은 2008-09 시즌 시즌 6관왕을 거머쥐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한 스페인 국가 대표팀의 월드컵 우승 등과 맞물려 '''아름다운 축구'''로 불리며 칭찬 받았었다. 심지어는 라이벌 팀 레알 마드리드 CF의 레전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나는 바르셀로나가 경기를 지배하는 모습에 감탄하고 그것을 좋아한다. 그들의 축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볼을 다루는 것은 존경스럽고 숭배스럽고 대부분 아름답다. 이 팀의 경기를 보는 것은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
에이스 리오넬 메시가 워낙 빛나다 보니 가끔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르셀로나는 리오넬 메시의 원맨팀이 아니다. 메시는 디에고 마라도나처럼 전통적인 10번에 해당하는 선수가 아니며 바르셀로나는 메시가 없더라도 주연이 돼 줄 선수들을 수 없이 보유하고 있다. 이 점을 무시하고 메시만 집중 견제하다가 메시의 개인 능력으로 그 수비진이 뚫리거나 메시가 반대 전환 패스를 넣어주고 침투하는 경우에는 수비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리고 한 동안 이 전술이 바르사 득점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였다. 다만 얇은 스쿼드는 크나 큰 문제점이다. 2011-12 시즌 시즌에 와서 그 문제점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수비진들이 그야말로 줄 부상을 당하면서 수비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아무리 볼을 오래 점유한다고 해도 축구는 득점 싸움이고 골키퍼와 함께 득점을 직접적으로 막아야하는 수비진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위협적인 슈팅을 내주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메시의 원맨팀은 아니라지만 메시가 빠진 바르셀로나는 전력이 매우 감소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2010년 시즌부터 바르셀로나의 모든 플레이는 메시가 중심이 되어있다. 중앙의 메시를 제외한 양쪽 윙 포워드는 상대의 포백을 끌고 올라가 중앙의 메시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플레이에 전념하고 있으며, 메시 뒤쪽에 포진한 선수들도 결국에는 메시에게 공을 연결해주는 것이 지상 과제인 상태. 2011-12 시즌 시즌 들어 차비 에르난데스의 노쇠화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전부터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그렇게 원했던 것이고, 결국 세스크가 오긴 왔지만, 여전히 수비진의 문제점은 남아있는 상황.[44] 그리고 2012-13 시즌 시즌 초반부터 수비진의 줄부상으로 수비에 크나큰 문제를 보이고 있으나 메시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버텨나가던 중 AC 밀란과의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에서 누적됐던 문제가 터졌다. 메시가 제 활약을 하지 못하자 팀 자체도 경기력이 떨어져 결국 패하고 만 것. 거기다 11경기 연속 실점으로 수비진이 여전히 문제라는 게 명확해졌고, 결국 이게 발목을 잡아 뒤이은 엘 클라시코마저 연속으로 패배하고 만다.[45][46][47]
시대를 풍미한 전술이었던 티키타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각 포지션에 그야말로 '티키타카'를 위한 선수들이 즐비해야 한다. 우선 선수들 간의 조직력은 그 어느 팀보다도 단단히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선수 개개인도 빠른 패싱 게임에 능숙해야 한다. 바르사의 최전성기 시절 즈음의 '티키타카'를 생각해보면 차비, 이니에스타, 메시, 부스케츠, 피케를 비롯한 모든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오랜 시간 함께 훈련해왔거나 아예 라 마시아때 부터 같이 바르사 소속의 모든 유소년 클럽들이 똑같은 점유율 축구를 가르치면서 동시간대에 훈련하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생겨난 단단한 조직력을 갖고 있었고, 선수 개인으로서도 발롱도르 1, 2, 3위가 모두 바르사 선수일 만큼 독보적인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었다. 그렇기에 바르셀로나의 성공이 불러온 패싱 게임의 바람에 힘입어 바르사와 비슷한 숏 패스 게임을 표방하는 팀들이 생겨났지만, 그 어떤 팀도 바르사의 최전성기에 도달뿐만 아니라 그 아우라조차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을 받고있다..
그리고 2014-15 시즌 시즌에 이르러 루이스 엔리케가 부임하면서 이전까지의 '티키타카'에서 탈피하여, 역습과 기동력을 장착한 '티키웨카'로의 변화를 이루어내었다. 사실, 다른 선수들은 어느 정도 대체 가능할지 몰라도 차비와 이니에스타가 노쇠화로 인해 기량이 떨어진 만큼 더 이상 이전까지 추구해온 고속의 패싱 게임을 계속 고집해 나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엔리케 감독은 이반 라키티치루이스 수아레스의 영입과 그에 맞는 새로운 전술을 바르사에 녹이는 것을 시도하였다. 라키티치는 당연히 차비의 기량을 따라 갈 순 없었지만, 차비가 갖지 못했던 빠른 기동력과 역습 플레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수아레스는 메시, 네이마르 주니오르와 함께 이른바 MSN이라 불리는 공격진을 결성하여 특유의 이타적이면서도 강력한 파괴력을 과시하며 영입 초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압도적인 시너지 효과를 냈다. 메시는 수아레스의 등장으로 오른쪽 윙[48]에서 주로 뛰게 되었고, 빌드업은 주로 메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메시가 빌드업을 맡게 되면서 중앙으로 이동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때 생기는 오른쪽의 공백을 메꾸어준 것이 바로 라키티치다. 말했 듯이 엄청난 활동량을 지닌 라키티치가 없었다면 2014-15 시즌의 전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전설적인 수비수 푸욜이 은퇴한 후 마땅한 파트너도 없는 상황에서 흔들리던 피케가 멘탈과 실력 면에서 점차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수비진도 안정감을 되찾았다.
2014-15 시즌, 역사적인 2번째 트레블 이후 해가 지남에 따라 엔리케의 MSN에 편중된 전술은 더해갔고, 중원의 노쇠화가 진행됨에 따라 전반기에는 좋은 성적을 내더라도 본격적인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가 시작되는 후반기에는 기복이 심해지며 MSN의 체력적 부하가 더욱 더 심해졌다. 결국 해가 거듭할수록 트로피의 수가 하나 씩 줄어들고 2016-17 시즌 시즌은 레알 마드리드에게 밀려 리그 준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8강 탈락, 코파 델 레이 우승컵[49]만을 들어 올렸다. 트레블 당시 중원의 기동력이 살아있었고 이니에스타, 부스케츠, 라키티치 역시 전성기의 폼을 유지해준 반면, MSN에 치우친 전술을 해가 가면 갈수록 떨어지는 중원의 기동력과 퍼포먼스에 부하를 걸었다. 결국 MSN의 3명의 개인 능력으로 골을 넣어주지 못하면 팀은 부진했고, 골을 넣기 위해 수비라인을 끌어올려 중원이 앞으로 나가면 상대방의 역습 상황에서 수비수의 빈자리를 커버해줄 중원의 멤버의 공간만큼 뒷 공간 비어버리고 말았다. 다니 아우베스가 팀을 나간 이후 이렇다 할 라이트 백 자원을 얻지 못했고, 세르지 로베르토가 임시방편으로 뛰면서 어느 정도 잘 매꿔 주었지만 하지만 완벽한 라이트 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진 못했다. 그렇다고 중원의 세대 교체를 위해 데려온 안드레 고메스 역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영입 실패와 기존 멤버들에게 의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엔리케 감독은 로테이션을 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했고 주전들의 혹사가 계속되었다. 바르셀로나의 전술은 뒷 공간이 많이 나는 전술이지만 과거 티키타카, 압도적 점유율, 중원의 수비 지원과 커버 능력, 수비수의 개인 능력, 골키퍼의 스위퍼 능력 등으로 역습을 막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커버를 하였다. 하지만 이것들이 중원의 노쇠화와 세대 교체 실패에 맞물려 최악의 약점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이런 식의 싸이클이 반복되면서 MSN의 체력적 부하에 의한 부진은 결국 시즌을 마무리 짓는데 너무 큰 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으로 변하고 말았다.
2017-18 시즌 시즌 엔리케 감독이 사임하고 에르네스토 발베르데 감독이 부임하였지만, 네이마르가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면서 사실상 MSN에 의존하는 전술을 끝이 났으며, 팀의 전술을 바뀔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구단 내부와 보드진 등의 문제로 제대로 된 이적시장을 보내기는 커녕, 간신히 빈공백 들만을 메꾸면서 시즌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대패를 하며 팬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구단에 대한 불만을 품은 상태로 시즌을 시작을 했다.
리그 시작 후 발베르데 감독은 '''티키웨카에서 다시 티키타카로의 회귀'''를 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공수 밸런스를 다시 잡기 위해 공격수가 아닌 중원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을 들고 나왔다. 중원을 패스로 장악하며 점유율을 올리고, 중원의 부족한 기동력을 메시가 전방과 중원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며 지원했다. 미드필더 3명과 공격수 3명이 상당히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며, 패스플레이를 했고, 이로 인해 과거 3년간의 혹사로 폼이 죽어있던 이니에스타, 부스케츠, 라키티치를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부스케츠는 피보테 위치에서의 안정감이 다시 살아났고, 라키티치 역시 2014-15 시즌 만큼은 아니지만 공수를 원활하게 굴려주는 엔진 역할을 해주었다. 이니에스타 역시 탈 압박 능력이 살아났고 메시와의 패스 연계가 살아나며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 1라운드 유벤투스 FC와의 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발베르데 감독이 엔리케 체재 당시 기용되지 못했던 데니스 수아레스나 바이백으로 영입된 제라르 데울로페우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제대로 된 영입 없이도 기존의 선수들을 살리고 부족한 기동력을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며 살려 놓았다. 이적 당시 상당히 논란이 많았던 파울리뉴 역시 발베르데 감독의 전술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이며 체력이 떨어진 라키티치 대신 뛰어난 체력으로 중원의 기동력을 살리고 강력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공수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훌륭한 박스 투 박스 역할을 해주었다. 티키웨카의 빨랐던 역습 템포를 늦추면서 높이 올라갔던 수비 시작 라인을 전보다는 조금 아래로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로 인해서 부스케츠가 상당히 중원에서 안정적으로 볼을 돌리는게 가능해지면서 중원이 패싱 성공률이 크게 올라갔다. 물론 리그 헤타페 CF 전에서 헤타페의 공격과 미드필더들이 강한 피지컬을 동반한 적극적인 압박을 중원에서부터 시작함에 따라 다소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발베르데 감독의 뛰어난 용병술로 팀은 승리했다. 이러하듯 과거 전술로의 회귀가 바르사를 다시 살리며, 시즌 시작 전 걱정과 불만은 시즌에 대한 기대로 바뀌고 있다. 유벤투스를 상대로 3:0 대승리를 가져갔지만 아직 까지 전술이 완성되어 보이진 않고, 거액을 들여 영입한 우스만 뎀벨레가 부상으로 약 4개월을 전력에서 이탈했고 수아레스 역시 시즌 초 부상 여파로 인해 최악의 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보완할 점들이 많아 보인다. 메시가 시즌전 휴가에서 푹 쉬고 돌아오며 최고의 폼을 유지하고 있고 왕성한 활동량을 가져가며 팀을 움직이고 있지만 메시가 없을 때 메시의 롤을 어떻게 분산시켜 팀을 움직일지 역시 중요한 요점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2017-18 시즌 초반의 좋았던 모습이 무색할 만큼 후반기로 갈 수록 선수단 전체가 무너졌다. 교체 카드를 자주 사용하지 않는 발베르데 감독의 특성 상 정해진 베스트 11 선수들에게 너무 많은 체력적인 부담이 따랐고 폼을 겨우 올려둔 이니에스타 역시 노쇠화로 인해 빨리 지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를 커버해 주어야 할 부스케츠는 원래도 기동력이 빠르지 않은 선수이기에 중앙 미드필더로 시작하던 전반기와는 달리 경기 내내 수비형 미드필더 지역으로 내려가서 볼 배급 역할만을 수행했고 부스케츠가 내려간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오른쪽의 라키티치가 점점 더 중앙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라키티치가 중앙으로 들어오자 오른쪽 측면의 메시에게 공을 연결해 줄 선수가 부족했고 결국 메시가 하프 라인 밑에까지 내려오면서 직접 공을 받고 플레이 메이킹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 시즌에는 메시와 조르디 알바의 조합이 역대 최고일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 전체는 밸런스를 잡아가며 경기를 수행할 수 있었다.
2018-19 시즌, 이니에스타의 이적 이후 메시를 아예 플레이 메이커로 사용하면서 메시의 부담감이 엄청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른쪽에 발 빠른 넬송 세메두가 풀백으로 위치하면서 빠른 오버래핑을 통해 메시를 서포트 해주었지만 메시 혼자서 이 모든 것을 해내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메시가 2014-15 시즌 이후 최고의 폼이라고 평가 받던 시기이기에 메시의 개인 능력이 경기 절반 이상을 혼자 이끌어 가면서 바르셀로나 또한 좋은 행보를 보여주었다.[50]
그리고 대망의 2019-20 시즌, 시즌 전반기와 후반기를 각각 발베르데, 키케 세티엔이 지도했지만 두 감독 모두 메시에게만 극한으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2010년대 최악으로 평가 받던 2013-14 시즌보다 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0년 전 만 해도 트레블에 6관왕, 엄청난 티키타카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전술적으로 완벽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선수 한 명에게만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꾸레들이 탄식을 내뱉었던 시기이다.

10.1. 전술에 관하여


공격시에 골키퍼를 제외한 10명의 선수 전체가 공을 돌려가며 올라오는 패싱 플레이를 하는 탓에[51] 공격 전개 도중에 공을 빼았겼을 경우 역습에 취약하다는 것이 약점. 실제로 바르셀로나의 실점 패턴 대부분이 역습에 이은 상대팀 공격수와 바르셀로나 수비진의 스피드 싸움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끈끈한 패싱 플레이를 차단해서 역습으로 가져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문제. 또한 어렵사리 역습까지 이어간다 쳐도 그 귀중한 기회가 100%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애초에 볼의 소유권이 넘어가는 즉시 피치위의 선수 모두가 강한 압박을 통해 다시 볼의 소유권을 가져 오려는 팀이 FC바르셀로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실적인 바르셀로나 공략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번째는 강력한 피지컬로 바르셀로나의 축구 자체를 무너뜨리는 작전이다. 08/09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에서 바르셀로나를 맞은 히딩크의 첼시는 디디에 드록바, 니콜라 아넬카, 프랭크 램파드, 미하엘 발락, 마이클 에시앙 등을 위시한 강력한 피지컬 축구로 바르셀로나를 압도하는 경기를 펼쳤으나, 희대의 오심과 막판 통한의 한골로 결승행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11/12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전의 경우, 첼시는 수비 범위를 페널티라인 근처로 설정하고 지역 방어를 펼쳐 바르셀로나의 패스 거리를 최소화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거기에 우월한 피지컬과 빠른 속도의 역습이 전술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였다. 그리고 페트르 체흐와 골대의 활약도 엄청났다.[52] 이에 바르셀로나는 1, 2차전 모두 효과적인 공격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으며, 상대를 끌어내지 못하고 공만 돌리는 의미 없는 점유율 축구를 펼쳤다. 이로 인해 지치고 집중력이 저하되어 첼시의 역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결과와는 정반대로, 경기력만 놓고 보자면 08/09 시즌의 첼시가 11/12 시즌보다 훨씬 훌륭했다. '''08/09 때와는 달리 11/12 때는 첼시가 한번 센터 서클 밟아보는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나 첼시가 그런 압도적인 열세에서도 얼마 안되는 찬스들을 모두 살리면서 찬스를 세 골이나 득점하면서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슈팅 수를 비교해보면 바르셀로나가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득점에 그쳤던 이유는 페트르 체흐의 야신 빙의 및 바르셀로나의 결정력 부족. 당시 주축 공격수였던 다비드 비야는 장기부상 중이었던 것도[53] 당시 바르사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12/13 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도 AC 밀란이 이 전술을 사용하여 바르셀로나를 완벽하게 틀어막았고, 후반전 두 골을 넣으며 2:0으로 승리했다. 마치 08/09 첼시와 바르사간의 경기마냥 바르셀로나는 유효 슈팅도 겨우 2개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공격 전개 자체가 틀어막혔고, 밀란은 미드필더진을 장악하고 피지컬로 압도하면서 전후반 내내 여러 번의 좋은 찬스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도 '''메시를 틀어막았다'''. 메시는 이날 유효 슈팅을 한번도 만들지 못하면서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부진했다.[54]
두 번째는 09/10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 1차전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처럼 그냥 공격적으로 맞불을 놓는 방법이 있다. 물론 철저한 존 디펜스와 팀원들간의 끈끈한 조직력, 뛰어난 개인기량, 90분 내내 뛰어다닐 수 있는 강인한 체력, 절대 움츠러들지 않으며 반드시 이기고 만다는 정신력, 상대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모두 뒷받침되어야만 쓸 수 있는 방법이다. [55]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항상 보유한 팀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오늘도 스페인과 유럽의 축구 클럽들은 바르사에게 미친듯이 털리고 있다. 실제로 08/09와 10/11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맨유는 바르셀로나의 패싱 플레이를 상대로 뛰어다니는 축구를 구사하다가 질질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주제 무리뉴 역시 레알의 감독을 맡은 뒤 엘 클라시코에서 맞불 작전을 여러 번 실시했으나 성공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종합해 볼 때, 바르셀로나에 대항하는 데에는 몇 가지의 요건이 있으며 이것을 많이 가질수록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뛰어난 골키퍼, 강력한 피지컬 능력을 가진 수비수와 수비 전술에 능한 수비수, 활동량을 기반으로 한 수비 능력이 좋은 중앙 미드필더, 원터치나 투터치로 미친 킬패스를 찌를 수 있는 중앙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 좋은 결정력을 기반으로 빠른 발, 강력한 피지컬, 수비 라인을 귀신처럼 뚫는 세 가지 능력 중 하나를 가진 공격수.
09/10 시즌 무리뉴의 인테르가 바르셀로나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리뉴 특유의 조직력과 디펜스 전술과 바르셀로나와 거의 비등비등한 월드클래스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 + 뛰어난 체력과 막강한 피지컬을 가진 수비수들(마이콘, 루시우 페헤이라, 월터 사무엘, 크리스티안 키부, 하비에르 사네티 등등) + 활동량을 기반으로 수비능력이 좋은 중앙 미드필더(에스테반 캄비아소) + 미친 킬패스를 찌를 수 있는 중앙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 (웨슬리 스네이더) + 좋은 결정력을 기반으로 빠른 발(사무엘 에투), 강력한 피지컬(고란 판데프), 수비라인을 귀신처럼 뚫는 능력(디에고 밀리토) 조합이 딱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2/13 시즌의 FC 바이에른 뮌헨 역시 정면승부를 펼쳐 바르셀로나를 그야말로 완파하였다. 중원에서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하비 마르티네스가 뛰어난 수비력, 활동량 그리고 차비와 이니에스타를 압도하는 피지컬을 과시하면서 바르셀로나의 전진을 저지했고, 부스케츠나 피케로부터 시작되는 빌드업은 토마스 뮐러마리오 만주키치가 봉쇄했다. 바르셀로나의 장기인 풀백으로부터의 측면 공격은 프랭크 리베리아르연 로번, 특히 리베리가 알베스에게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저지했다. 패스는 제대로 돌지 않았고, 심지어 메시가 받으러 내려왔던 국면에서조차도 강력한 육체적 압박과 좁은 공간에 드리블은 실패했다. 메시는 그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불리는 지나치게 모험적인 패스 끝에 공격 기회를 날리기 일쑤였다. 바르셀로나는 바이에른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실패했다. 당시 바이에른이 자랑했던 개진은 바르셀로나 풀백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 아니라[56] 위협적인 속도와 놀라운 드리블 실력으로 역습의 선봉에 서면서 바르셀로나의 측면 전진을 견제했다. 여기에 세계 최고의 풀백인 필립 람과 젊고 빠르고 과감한 데이비드 알라바는 바이에른의 리베리/로벤과 연계하며 측면을 사실상 바이에른의 것으로 만들었다. 바이에른은 바르셀로나의 강력한 무기인 전방 압박을 때로는 부드러운 패스 플레이로, 때로는 뻥축구로 대응했는데 뻥축구마저 골키퍼 노이어의 준수한 골킥과 중앙 공격진의 강력한 피지컬 또는 날개진의 뛰어난 스피드로 위협적인 경합 장면을 보여주며 바르셀로나를 뒷걸음치게 했다. 그 결과 바이에른은 많은 코너킥 기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바이에른은 첫 번째 골과 두 번째 골을 코너킥 상황에서 가져갔다. 그리고 역습 상황에서의 측면 돌파를 이용해 세 번째, 네 번째 골과 엮으면서 4:0으로 바르셀로나를 완파했다. 2차전에서도 바르셀로나는 비슷한 전술을 택한 바이에른을 넘어서지 못했고, 역습 상황에서의 측면 공격에 완벽하게 파괴되면서 3:0으로 패배, 총합 7:0으로 대패했다.
이 결과는 (바르셀로나가 테크닉, 특히 중원의 테크닉이 앞선다는 걸 가정한 상황에서) 대 바르셀로나전 키워드, 1. 미드필드에서의 체격 조건의 우위로 전진 봉쇄, 2. 크로스 상황에서나 공중볼 경합 상황에서 높이의 우위, 3. 바르셀로나의 엄청나게 높은 수비 라인을 측면 돌파로 후벼파기 이 3가지를 모두 효과적으로 수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하비 마르티네스는 이니에스타를 완벽히 찍어누른 걸로도 모자라 바르셀로나 미드필더진의 다른 영역까지도 틈나는 대로 잡아먹었고, 바르셀로나는 주지하다시피 피케나 부스케츠[57] 정도를 제외하면 공중볼 루저들에, 리베리와 로벤, 람과 알라바는 이 우위를 효과적으로 이용 가능하도록 바르셀로나의 측면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58]
첼시나 인테르와는 달랐던 점을 들자면 첼시는 강력한 피지컬로 중원에서 밀리지 않았으며 중원 삼각형의 꼭지점인 램파드는 원투터치로 정확한 스루를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이고 드록바는 피지컬 괴수 공격수다. 인테르는 정확한 패스를 제공할 수 있는 스네이더와 타고난 골잡이인 에투와 밀리토 삼각편대가 역습으로 비수를 꽂는 조합이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은 중원에서의 파워도 파워이거니와, 양 측면 날개와 풀백 전부가 어떤 옵션으로도-스피드, 드리블, 크로스, 연계, 중거리,- 바르셀로나를 압도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중원에서의 힘싸움 및 수비적 경합에서 '''야야 투레와 케이타[59]라는 강력한 미드필더'''들이 주던 우세를 잃어버렸으며, 수비적으로 힘과 높이와 안정성을 통해 커다란 보루가 되어 주던 아비달마저도 병마로 인해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즐라탄처럼 공격진에 크게 차별적인 옵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선수조차도 없었다. 물론 바르셀로나의 팀 컬러 상 피지컬을 통한 돌파보다는 패싱을 통한 탈압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선수들의 평균 피지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건 사실이나 지금까지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압박을 통해 볼을 뺏어내면서 다시 티키타카를 시전하는 방식으로 주도를 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전에서는 그 압박이 전혀 통하지 않으면서[60] 모두 개발살나버렸고, 이는 바르셀로나에게 주어진 큰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푸욜의 대체자를 찾는 것도 급선무일 것이다.
12/13 시즌 이후로 바르셀로나가 더 이상 예전의 강력함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사실. 즉, 바르셀로나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략법인 '''시간의 경과'''가 작용한 것이다. 다시 시간을 라누스 미헬스와 요한 크루이프의 시기로 되돌려보자. 이 시기 토털 풋볼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토탈 풋볼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끌었던 매직 마자르는 경이적인 기록을 쌓았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축구계에 큰 충격과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 시대의 대세가 되지도 못했다. 요는 '''토털 풋볼이 따라하기도, 그리고 성적을 일정하게 유지하기도 대단히 어려운 전술'''이었다는 것이 요체이다. 토털 풋볼을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서는 체력적, 기술적 바탕 아래에서 꾸준한 반복 훈련을 통해서 전술을 완성해야 했다. 이중에서 하나라도 틀어지면 와르르 무너졌던 무수한 전례가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시대의 대세가 된 것이 아리고 사키로 대표되는 현시대의 축구이다.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는 차비, 이니에스타, 푸욜 등의 우수한 자체생산 선수가 동시에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여기에 크랙인 메시가 더해지면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선수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기본적인 실력도 좋아야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전술에 적절하게 조화되는 것도 필요하다.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하는 라 마시아에서 주전선수들을 대체해주면 좋겠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드러났듯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르사의 토털 풋볼의 단점이 드러나기 시작한 11/12시즌 후반기부터 미드필더진 의 노쇠화가 일어나면서 바르셀로나의 토털 풋볼 전술이 조금씩 삐걱대기 시작했고, 여기에더해 선수들의 부상까지 더해져[61]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동안은 사비,이니에스타,부스케츠로 일컫는 세얼간이 미드필더진이 필드 전역을 뛰어다니며 상대의 압박을 뿌리치고 볼을 배급하고, 상대방의 역습시에는 강한 압박을 통해 막는, 공격과 수비가 조화를 이루었는데 여기에 가장중요한 체력이 노쇠화로 인해 떨어지기 시작하니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62] 이때 만난게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바이에른 뮌헨. 전술적 카운터까지 맞은 바르셀로나는 4강 도합 7점차라는 압도적인 점수차로 패배를 하게된다.
13/14 시즌을 맞이하여 바르셀로나는 여전히 긴축재정을 진행중이지만, 네이마르를 무리해서 영입하였다. 그리고 미드필더와 수비수에서 주전의 대체자를 영입하지는 못했다. 만일 네이마르가 적어도 제 2의 에투급으로 활약해주지 못한다면, 14/15 시즌은 더더욱 암담한 상태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14/15 시즌 루이스 엔리케가 감독으로 들어오면서 전술상의 변화가 생겼다. 기존에 비하면 정교한 티키타카를 보이지는 않지만 역습을 시도하는 등 공격 속도가 더욱 빨라졌고, 이는 루이스 수아레스가 팀에 녹아들기 시작하면서 메시-수아레즈-네이마르를 필두로 공격을 전개하는 전술을 보이고 있는데, 엔리케 감독은 라키티치의 영입으로 중원에서의 기동성과 역습 능력을 확보하였고, MSN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파괴적인 역습을 하는 팀이 되었다. 사실상 이제 바르셀로나는 '티키타카'에서 어느정도 벗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이전에 없던 기동성과 역습 능력은 바르셀로나의 전술이 수차례 헤매이던 과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증거이며, 그 성과는 지금 트레블을 눈앞에 두고있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축구 역사상 최초로 두 번째 트레블을 달성하면서 전술상의 변화 결과가 성공적으로 증명되었다.
다만, 이러한 전술상의 변화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상황이 여의치 않다보니 변화시킨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차비, 이니에스타의 노쇠화에 따른 대체 자원부족, 부스케츠의 체력방전 등으로 인해 바르사가 자랑하던 중원은 그 위용을 잃어가고 있었고, 더 이상 중원에서부터 점유율로 눌러버리는 전술을 구사하기 어려워지자 MSN을 이용해 무게 중심을 앞단으로 끌어올리는 전술로 탈바꿈 한 것이다.
16/17 시즌을 마지막으로 위에 기술 되었다시피 MSN에 편중된 전술, 즉 티키웨카가 실패한 이후 17/18 시즌 엔리케 감독 사임 이후 새로 부임한 발베르데 감독의 전술을 보자면 기본의 바르사 전술로의 회귀가 눈이 띄게 보인다. 물론 토탈 사커를 기본으로 하는 전술적바탕은 그대로지만, 높은 점유율과 패스 횟수를 가져가고 중원을 장악하며 킬패스를 전방에 찔러주는 과거의 티키타카 전술을 살리며 노쇠화된 중원을 살리고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메시와 이니에스타, 부스케츠이며 바뀐 전술자체가 기동력을 중심으로 하던 이전 전술에서 공수 밸런스를 중요시 하는 전술로 바뀌며 폼이 크게 살아났다. 다만 이렇게 바뀐 전술은 과거에 타팀들이 공략을 시도했던 대로 피지컬과 체력으로 중원을 강하게 압박하고 패스 경로 등을 차단 해버리는 압박 전술을 들고 나와버리면 역시 경기 흐름이 나빠져 버리는 모습 또한 보여주었다.
최전성기로부터 10년이 지난 18/19 시즌 현재, 윗말들은 대부분 과거가 되었고, 바르사의 불변할 것 같던 철학은 녹슨지 오래다. 스쿼드의 힘으로 어떻게든 강팀의 모습을 보여주곤 있지만 뚜렷한 개성과 전술은 점점 흐려지고 있다. 바르사의 아이덴티티였던 점유율 축구는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삼각점이 핵심이었다. 수비진, 중원, 공격진이 모두 공을 중심으로 쉴새없이 움직이는 삼각점을 만들어가며 압박을 해체해가는 과정이 바르사 축구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는데, 이제는 현란한 삼각점의 움직임은 아예 볼 수 없다. 최고급의 기술과 축구지능을 갖춘 차비와 이니에스타가 없는 지금은 점유율 축구를 흉내낸다는 표현이 맞을 듯. 중원의 두뇌들이 없어진지 오래인 바르사의 축구는 현재 메시를 필두로 한 최고급 스쿼드의 개인 능력으로 어찌저찌 먹고 산다고 볼 수 있다. 메시 혼자 지능적인 빌드업을 해내려고 하는 움직임도 보이지만 축구는 혼자 하는게 아니고 메시의 체력 역시 홀로 작업을 해내기엔 무리가 있다. 현재 바르셀로나의 가장 확실한 공격 패턴은 바짝 올라온 수비진이 공을 최대한 상대편 진영에서 돌리고, 그 볼을 이어받은 메시가 2:1 패스로 압박을 부숴내거나 킬패스를 날려주는 것, 혹은 빠른 스피드로 침투하는 알바를 이용하는 것 이외엔 전무하다. 급해질때마다 뻥축구를 구사하는 현재 바르사를 보고 있자면 세월이 무상할 뿐.[63]

11. 라이벌



11.1. 엘 클라시코 (El Clásico) - 레알 마드리드 CF


'''엘 클라시코(El Clásico)'''
[image]
[image]
'''FC 바르셀로나'''
'''FC Barcelona'''
'''레알 마드리드 CF'''
'''Real Madrid CF'''

상대전적은 엘 클라시코 문서 참조.
시작은 조안 감페르와 스페인을 쿠데타로 장악했던 리베라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리베라가 딱히 레알을 지지한 것도 아니고, 감페르보다 리베라 정권이 빨리 무너졌기 때문에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조안 감페르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 원인은 리베라와의 대립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 대공황의 여파였다.
문제는 스페인 내전 시기이다.[64] 이 때의 대표적인 인물이 주젭 수뇰(Josep Sunyol I Garriga)이다. 본래부터 '''카탈루냐 독립파이면서 강성좌파'''였던 태생적으로 정치가의 아들이면서 카탈루냐 좌익 정파였던 ERC(Esquerra Republicana de Catalunya)의 당원이기도 했으며, 좌익신문 라 람블랴의 창립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수뇰이 1935년 카탈루냐 축구협회장이자 바르셀로나 회장이 된다. FC 바르셀로나에 카탈루냐 민족성에 더해서 반 정부 성향이 강해진 것이 이 시기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터졌고, 수뇰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추종 세력으로 추정되는 세력에게 총살을 당해서 암매장 되었다.[65] 이 사건으로 인해서 FC 바르셀로나와 수뇰은 카탈루냐 독립운동과 반 프랑코 투쟁의 상징이 된다.[66] FC 바르셀로나에 강경한 분리주의와 반 프랑코 성향이 본격화 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이 이전의 FC 바르셀로나는 에스파뇰을 포함한 이 지역 축구협회에 모두 관여하기도 하는 등 딱히 민족분리나 독립 성향이 강하지 않았다.[67][68]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면서 총통의 자리에 오른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 국가주의를 주장했다. 모든 지역에서 지역색을 빼는 작업을 시작했고, 그 중에서 가장 강한 타격의 대상이 된 것이 좌익이면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바스크를 제외한다면 스페인 내전 시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카탈루냐 지역이었다.[69] 프랑코는 모든 축구팀의 명칭은 스페인어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영어식으로 Football Club의 약자인 FC를 사용하던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어 문법에 따른 명칭'''인 Club de Futbol의 약자인 CF로 바꾸어야 했다.[70] 그리고 스페인 이외의 민족적이고 지역적 상징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카탈루냐 기를 사용했던 바르셀로나의 앰블렘도 교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위의 앰블렘 변천을 보면 잘만 들어 있어서 상당히 의심스럽다. 또한 1940년 프랑코 지지자였던 엔리케 피녜이로[71]가 바르셀로나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바르셀로나 경기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의 취임이었는데, 오히려 나중에는 바르셀로나를 정치에서 보호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단적으로 엔리케 피녜이로 회장 재임 시기인 1943년 6월 코파 델레이 준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경기는 노골적인 경기 조작이 있었다. 1차전 홈경기에서 바르셀로나가 3대 0으로 승리한 이후, 차마르틴 경기장에서 벌어진 레알 마드리드의 홈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11대 1로 승리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보안부장이 전반전 시작하기 전에 "니들이 경기 뛰는건 위에서 눈감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협박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피녜이로는 이에 대해서 항의하고 사임했다. 이후 바르셀로나 회장직은 프랑코 체제 임명 시기를 짧게 거치다가 오히려 강경한 대응이 더 문제를 야기한다는 판단이 내려져서 카탈루냐 출신 임명을 거쳐서 자체 선임으로까지 변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스페인 축구협회는 해당 경기를 무효로 처리했고, 이후에 회장에 취임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회장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 이후 1978년까지 이어진 프랑코 치세에서 바르셀로나는 8번의 리그 우승, 10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고, 오히려 레알 마드리드는 53-54 시즌 리그를 우승할 때까지 21년의 무관 세월을 보내야 했다는 점에서 프랑코가 레알 마드리드를 밀어주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실질적인 지원이 있기는 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레알 마드리드 항목에 이에 대한 글이 적혀 있으니 참고.[72]
하지만 프랑코의 스페인 민족주의라기보다는 우파 국가주의와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민족주의 + 좌익적 성향에 더해서 저 앞서 언급된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승부조작 사건의 임팩트가 더해져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카탈루냐와 카스티야라는 해묵은 민족간 대립이 오히려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73][74]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선수 이적은 불가능에 가까웠는데[75][76], 드물게 있었던 두 팀간 이적에서 루이스 피구 사건만큼 두 팀의 갈등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는 드물 것이다. 피구는 바르셀로나에서 부주장의 위치까지 오르며[77]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피구 본인도 레알 마드리드를 신나게 디스하면서 바르셀로나의 심장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2000년에는 무시무시한 계약파동 끝에 바르셀로나 최대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피구와 에이전트가 주급인상을 요구하며 레알과 바르셀로나 사이를 오가다가 강제 이적 협상 허가 조항(바이아웃)을 발동한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을 체결한 것. 결국 시즌이 지나고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누캄프에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가 열린 날, 10만 꾸레들에게 FUXX과 수전노 등 야유를 한몸에 받았다. 피구의 이적건은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의 직접 이적으로 충격을 선사한 것이 이펙트가 컸기에 상당히 많이 회자가 되었다. 직접 이적은 아니지만 한 다리 건너 나중에 이적하여 제대로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온 사례 역시 있다. 사무엘 에투가 적합한 예인데, 유망주 시절 1군에서 뛸수 없어서 B팀과 임대를 전전하다가 2000년 레알 마요르카로 이적 후 활약, 약 4년 뒤인 2004년에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되었는데 바르셀로나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펼치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에게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로 인해 레알 마드리드는 선수가 이적할 시 차후에라도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지 않겠다는 조항을 계약안에 반드시 추가한다고 한다.[78] 덧붙여서 반대 사례로 루이스 엔리케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FC 바르셀로나로 직접 이적한 전적이 있다.
이렇듯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간의 더비매치, 즉 엘 클라시코는 그 명성답게 화려하면서도 두 지역 간의 엄청난 악감정 때문에 누구 하나 작살날 것 같은 무서운 분위기로 진행되곤 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주요 선수들로 이루어진 스페인 대표팀이 2008 유로 - 2010 월드컵 - 2012 유로에서 3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두고 두 팀 선수들 사이에 스페인 국가대표라는 유대감이 생기면서 꽤 훈훈한 분위기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79] 그리고 외국인 용병들의 경우 지역감정이나 팀 간의 적개심과는 별개로 본인이 좋아하는 상대 팀의 선수들과 친목을 다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레알 마드리드의 곤살로 이과인은 엘 클라시코가 벌어지면 맨 처음 하는 행동이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를 찾아가서 껴안고 뽀뽀하며 친밀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메시 역시 이렇게 행동하는 이과인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엘 클라시코이기 이전에 같은 국적의 동질감 때문에 메시와 이과인, 더 나아가 디 마리아나 마스체라노 등 아르헨티나 선수들 모두가 엘 클라시코 라이벌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분이 깊다. 카스티야와 카탈루냐 출신들이 아닌데다 그냥 같은 국대 선수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거니 팬들 역시 오히려 보기 좋다면서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80]

11.2. 데르비 바르셀루니 (Derbi Barceloní) - RCD 에스파뇰


'''데르비 바르셀루니 (Derbi Barcelon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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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FC 바르셀로나'''
'''FC Barcelona'''
'''RCD 에스파뇰'''
'''RCD Español'''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에스파뇰은 카탈루냐 지방 바르셀로나에 사는 카스티야인들이 만든 클럽이다.[81] 축구를 보고 싶지만 카탈루냐인들이 만든 FC 바르셀로나를 응원하기 싫었던 카스티야인들이 따로 만들어낸 클럽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라이벌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같은 카탈루냐 지방의 축구 클럽이지만 서로 스페인 잔류와 카탈루냐의 독립 쪽을 대변했던 팀이기에 치열한 라이벌이다. 흔히 카탈루냐 더비라고 부르며, 연고지로 하고 있는 바르셀로나 지방의 로컬 매치라고 볼 수 있다. 한낱 리그 중위권 팀과 최상위권 팀의 더비가 무슨 볼 맛이 있겠냐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스페인 역사와 양 클럽간의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물론 90년대 들어 에스파뇰이 카탈루냐 지역팀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며 과거와 같은 역사적, 정치적 성향이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두 팀의 매치는 뜨겁다. 경기를 보면 정말 여타 더비 매치와 다를바 없는 치열한 경기가 펼쳐진다. 실제로 2015-16 시즌 매치를 보면 스터드로 자신의 다리를 밟은 파우 로페스 골키퍼에게 메시가 빡쳐서 다가가는데 수아레스가 이를 말리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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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를 말리는 수아레스'''
이러하듯 실력차가 넘사벽임을 떠나서 라이벌이라 할 수 있겠다. 오죽하면 2000년대 중반, 바르셀로나로 막 이적해서 공항에 도착한, 잔루카 잠브로타가 택시를 타려고 하자 에스파뇰 팬인 택시 기사가 승차 거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도 여전히 바르셀로나 팬이나 에스파뇰의 팬이 각기 다른 팀을 응원하는 택시기사를 만나면 같은 상황이 펼쳐지곤 한다고 한다.
17/18 시즌 카탈루냐 지방 지로나를 연고지로 하는 지로나 FC가 라리가로 승격하며 또 다른 카탈루냐 더비가 성사되었는데, 그로 인해 에스파뇰과의 더비는 카탈루냐 더비라고 부르기 보단 연고지 명이 바르셀로나 더비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으로 보인다.

12. 구단 산하



12.1. FC 바르셀로나 B




12.2. 클럽하우스, 유스시스템 - 라 마시아 데 칸 플라네스




12.3. 클럽 훈련장 - 시우타트 에스포르티바 조안 감페르




12.4. 여자 축구 - FC 바르셀로나 페메니




13. FC 바르셀로나에 대한 말말말


'''내 생각에 축구 역사상 최고의 클럽은 2009에서 2011년 까지 이어진 바르셀로나이다.'''

-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내 생에 바르셀로나는 내 생애 경험했던 최고의 팀이다.'''

-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바르셀로나와 리오넬 메시가 세계 최고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다.'''

- 곤살로 이과인, 전 레알 마드리드 시절 인터뷰에서.

'''바르셀로나의 축구가 세계에서 가장 날카롭다. 선수 개개인의 역량과 팀 전체의 완성도 또한 바르셀로나가 다른팀들 보다 우월하다. 우리가 바르셀로나에 패했을 때, 결과는 물론 내용에서도 그들보다 우세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심지어 바르셀로나와 비겼을 때도 더 좋은 팀은 그들이었다.'''

- 디에고 시메오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

'''바르셀로나는 33명의 축구선수들과 대결을 해도 이길 것이다. 그들은 축구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이다.'''

- 프란체스코 토티, AS 로마 레전드.출처

'''우리의 유니폼에는 클럽의 피가 흐르고 있다. 나는 바르셀로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카를레스 푸욜, FC 바르셀로나 레전드.

'''나는 바르셀로나가 경기를 지배하는 모습에 감탄하고 그것을 좋아한다. 그들의 축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볼을 다루는 것은 존경스럽고 숭배스럽고 대부분 아름답다. 이 팀의 경기를 보는것은 모든 것중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

'''바르셀로나의 축구를 대하는 태도와 경기를 치르는 방식을 존경해요, 항상 저에게 특별한 영감을 줘요. 축구를 삶으로 대하는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죠. 솔직히 이젠 축구가 재밌진 않아요, 즐길 나이나 시기도 지났을뿐더러 수비 전술이 발전하면서 하는 이들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재미없는 경기가 많아졌기 때문이죠. 또 언제부턴가 축구가 승리와 돈이 전부가 돼버린 지금 축구는 죽었다 생각해요.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아직 축구가 죽지 않았다는 걸 상징하죠, 그것이 저에겐 평생의 목표이자 꿈이예요.'''

- 아템 벤 아르파 스타트 렌 선수, 스페인 매체 <마르카>와 인터뷰에서.


14. 여담


  • 요한 크루이프의 언급처럼 이상적인 토탈 풋볼을 구체화 시킨 팀이라고 볼 수 있다. 의외로 역대 감독들이 바뀌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바르셀로나는 몇십 년째 커다란 틀에서는 변한 게 없다. 현재의 티키타카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70년대 중후반에서 80년대를 꿰뚫는 하나의 라인을 형성하는데, 그 이름하여 바르작스(Barjax). AFC 아약스의 유스 시스템을 거치고, 네덜란드 리그에서 검증받고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맞는 코스는 유럽 축구의 하나의 엘리트 라인을 형성했다. 그 대표적인 선수가 요한 크루이프, 그리고 70년대 네덜란드 국가대표 팀에서 지휘관 크루이프의 부관으로 잘 알려진 요한 네스켄스이다.[82][83] 크루이프가 다 늙었어도 바르셀로나에 대해 말도 많고, 또 여전히 명예직이지만 주는 자리는 덥썩덥썩 다 받아먹는 이유가 그냥 생겨난 게 아니다. 그만한 임팩트가 있었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 모든 축구팀들이 펠레 넘버인 등번호 10번에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긴 하지만 특히 바르셀로나의 경우 그 라인업이 매우 화려하다. 무려 마라도나 - 호마리우 - 히바우두 - 호나우지뉴 - 리오넬 메시 등의 레전드 선수들이 포진한,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10번 계보를 자랑한다. 이중 직접적으로 등번호를 넘겨받은 사람은 사실상 리오넬 메시가 유일한데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장기 10번을 달고 있는 중인데다 그 위상이 워낙에 엄청나다보니 은퇴 후 영구결번으로 남겨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돈 적도 있으나 라리가 시스템 상 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덕분에 메시 다음으로 10번을 물려받을 직계 후임자의 부담감을 우려하는 여론이 매우 많다.
  • 레알 마드리드는 Real Madrid C.F.인데, C.F.는 스페인어로 Club de Futbol이고, 카탈루냐 지방 언어와 순서 배치가 다르다. 실제로 프랑코의 독재 시절에는 C.F. 바르셀로나로 팀명을 기록해야 하기도 했다. 이는 역대 바르셀로나 엠블럼에서 1939년[84]부터 한동안 C.F.B라고 적혀있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 로날드 쿠만 또한 바르작스 라인을 탔던 선수이다. 바르작스(Barjax) 라인은 1990년대에도 이어지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에드가 다비즈나, 마크 오베르마스 와 같은 선수를 그 이후 세대 바르작스라 한다. 다만 아약스에서 바로 바르셀로나로 온 것은 아니었고, 다른 팀을 거쳐서 왔으며, 실제적으로 전성기는 바르셀로나에서 보내지는 않았지만, 크루이프와 네스켄스 시대를 거쳐오면서 많은 선수들이 Barjax를 거쳐온 것 또한 사실이다.
  • 의외로 챔피언스 리그 첫 우승이 늦은 팀이다. 대개 바르셀로나 정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팀이 창단 후 9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이 없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인데, 그 숙원을 풀어준 사람은 바로 요한 크루이프. 선수로서도 뛰어났지만, 감독으로서도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Barjax는 단순히 그 당시 뛰었던 선수들로만 이어진게 아니라, 크게 보면 네덜란드 커넥션과도 연결되는데, 요한 크루이프 이후 바비 롭슨 시대를 거쳐 등장한 감독인 프랑크 레이카르트로 이어진다. 정확히 롭슨을 제외하고 보면, 크루이프와 레이카르트 둘 다 토탈 풋볼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가 발굴해 낸 선수이며, 과르디올라를 발굴해낸 사람은 바로 크루이프이다.
  • 연예인 중에서는 김옥빈, 정용화, 윤두준, 임영웅이 바르셀로나의 팬이며, 정용화는 데뷔 전 스키장에 갔을 때 스키복 안에 레플리카를 입고 있는 사진이, 윤두준은 바르셀로나 담요를 가지고 인증샷을 찍은 사진이 인터넷상에 퍼져 있다. 또한 김준수는 원래 앙리 팬이었으나 앙리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바르셀로나에 대해 흥미를 갖고, 현재는 메시 팬이 되었다고 한다. 임영웅은 인스타그램 팔로잉이 4개인데 그 중 1개가 리오넬 메시고 1개는 바르셀로나 공식 인스타계정으로 메시의 팬이라고 한다.
  • 2009-10시즌 챔스 4강에서 인테르에게 3-2로 탈락했지만, 라 리가에서 20번째의 우승을 달성하였다. 2010-11시즌은 코파 델 레이를 레알 마드리드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빅 이어와 리그를 쟁취하며 더블을 달성.
  • 엠블럼에 있는 공을 보면 배구공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엠블럼이 제정될 당시에는 축구공의 모습이 현재와는 달리 배구공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 엉덩이가 스페인어로 Culo, 카탈루냐어로는 Collegi(꾸레지)로 줄여서 Colle라는 발음에 가까운데, Cule(꾸레)는 엉덩이로 내민 자로 해석하면 된다고 한다. 이는 과거 바르셀로나 홈구장 담벼락에 걸터앉아 경기를 구경하던 사람들의 엉덩이가 지나가던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바르셀로나 팬들을 가리켜 '꾸레'라고 부른다.참고
  • 축구 관련 커뮤니티에서 꾸레화라는 표현이 종종 쓰이는데, 이는 원래는 준수한 외모를 자랑했던 선수들이 바르셀로나로 이적해온 이후부터 역변되어 망가지거나 유스 시절 준수했던 선수들이 역변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다비드 비야, 제라르드 피케 피케의 역변, 세스크 파브레가스, 네이마르, 차비 에르난데스 등등이 있다. 이런 평가를 받는 공통된 이유 중 하나는 바르셀로나에 간 이후의 선수들이 아랍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수염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덥수룩하게 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동양권의 수염 혐오(?)와 상관없이 서구권, 특히 중동 문화가 뒤섞인 스페인에서는 수염이 성숙한 남성임을 증명하는 문화가 강하고, 실제로 젊은 시절에는 열심히 면도를 하던 선수들이 서른 줄에 이르러 수염을 기르는 경우가 많다. 신입들은 수염 기르기를 자제하는 편이다.
  • 바르셀로나 지방 현지인에게는 거의 FC 바르셀로나는 축구 클럽을 떠나 종교나 다름 없다고 하며, 그 교주가 이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릴 수 있지만, 현지 팬들의 위세를 보면 카탈루냐 시민들에게 축구라는 스포츠가 삶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 월트 디즈니 픽처스픽사가 FC 바르셀로나를 소재로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다. 내용은 클럽의 역사에 관한 것이 될 것이라 한다.
  • 21C 이후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신기한 징크스를 만들었는데, 바로 준결승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결승 진출한 팀이 우승한다라는 것이다. 2001년 9월부터 시작한 2001-02 시즌부터 따졌을 때 총 8번의 선례가 있다.[85][86]

14.1. 바르셀로나의 아시아 선수


아시아 선수가 과거에 딱 1명 있었다. 그런데 그 한 명이 '''바르사의 초대 주장'''이자 '''첫 번째 슈퍼스타'''다! 1910년에 필리핀과 스페인 이중 국적[87]의 선수 파울리노 알칸타라(1896~1964)이다. 지금까지도 유일한 아시아 국적의 바르셀로나 1군 선수인 알칸타라는 1912년 15세 4개월 18일의 나이로 카탈라(Catala)전에 출장하여 첫 세 골을 터뜨리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바르셀로나의 9대 0 승리. 리그 경기 첫 출장은 1912년 8월 14일에 벌어진 시바델(Sibadell)전이었으며, 여기서도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또한 그 다음 치러진 비야레알과의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하는데 바르셀로나가 3-2로 이긴 그 경기에서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 라울 호세는 저 빼빼마른 선수가 도대체 누구냐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다가 1916~18년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필리핀으로 돌아가 필리핀의 보헤미안 클럽에서 3시즌을 뛰면서 필리핀 국대선수로도 활약했다가 1918년 이후로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고, 2중 국적이었던 그는 스페인 국대선수로도 활약하며 6경기에 나섰는데 5골을 기록했다. 더불어 1922년 4월 30일에 벌어진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골을 넣었는데 골이 골네트를 뚫고 넣는 진기한 장면까지 보여줬다. 이 당시엔 국대 관련 규정이 약한 편이어서 두 나라에서 국가 대표로 뛰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알칸타라는 1927년에 은퇴할 때까지 '''357경기에서 무려 357골'''을 터뜨리며 팀이 5번 코파 델 레이, 10번 카탈루냐 리그를 우승하는 데 맹활약을 하면서 바르셀로나 전설로서 길이남아 역사를 남겼다. 다만 공교롭게도 그가 뛰던 시절 프리메라 리가는 프로 리그가 아니었고, 그가 은퇴하고 나서인 1928-29시즌부터 프로 리그를 개막했다. 그가 만약 30년 늦게 태어났더라면, 바르셀로나가 1960-61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을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여담으로 알칸타라는 필리핀 국대 축구선수로 활약하며 1917년 일본 원정에서 벌어진 극동선수권 대회에서 '''15-2'''로 일본을 뭉개는데 기여했다. 이당시만 해도 필리핀은 아시아 축구 선진국이었다. 이는 일본 축구역사상 최다 실점패인데 이 굴욕을 잊지 못한 일본은 딱 50년 뒤인 1967년에 필리핀과 재경기를 치러서 이번에는 15:0으로 설욕하며 일본과 필리핀이 서로 축구 최다 실점과 최다 골득점을 서로간에 기록하고 있다.
유일했던 아시아 선수였던 알칸타라 이후, 오랜기간 아시아 선수가 없었지만 한국의 유망주인 백승호이승우, 그리고 장결희까지 3명의 선수가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팀에 입성했다. 그러나 이후 이 세 명 모두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영입에 관련한 FIFA의 징계를 받아 한참 중요한 시기에 팀내에서 훈련과 공식 경기를 치르지 못했고, 이승우는 이적까지 고려했었으나 결국 세 명 모두 잔류를 선택했다.
2016년 1월, 바르셀로나의 선수 등록 금지 징계가 풀리고 이미 5년의 거주 기간을 채워 영주권을 확보한 백승호와 만 18세가 되어 역시 마찬가지로 징계가 해제된 이승우가 팀에 복귀하였고, 백승호는 2016년 2월 20일에 세군다 B 22라운드에서 후반 교체 출전하며 바르셀로나 B 데뷔전을 치렀다. 프로 경기로 한정한다면 최초의 바르셀로나 선수가 된 셈. 이승우도 2016년 3월 14일에 세군다 B 경기에 출전하며 바르셀로나 B 데뷔전을 가졌다. 장결희의 경우 생일에 늦은 탓에 2016년 4월에 징계가 풀렸으나, 선수 등록 기간이 지난 탓에 2016-17 시즌부터 출전할 예정이다.
그리고 2016-17 시즌, 백승호가 공식적으로 바르셀로나 B 시즌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며 1군 진입을 위한 마지막 단계에 올랐다. 이미 프로 선수로는 아시아 최초의 선수가 된 셈이지만 오랜 기간 바르셀로나 1군에서 활약한 레전드인 알칸타라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큰 의미를 둘 기록은 아닌 셈이다. 이승우 또한 바르셀로나 B의 제안을 받았지만 오랜 기간 징계로 경기를 뛰지 못했기에 더 많은 경기를 소화하기 위해 후베닐 A에 남았다. 바르셀로나 B에 이름을 올리면 후베닐 A 경기는 물론 UEFA 유스 리그 또한 출전할 수 없기 때문. 더군다나 백승호의 경우 이미 나이가 초과해 유소년 팀에 남을 수 없었고, 이승우는 유소년 팀에서 마지막 시즌을 맞이하며 프로 진입을 위한 마지막 담금질을 할 기회가 있었던 셈이다. 결국 장결희와 함께 후베닐 A 소속으로 2016-17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으나...결국 백승호, 장결희, 이승우는 1군에 진입하지 못하며 모두 바르셀로나를 떠나고 말았다. [88] 현재는 바르셀로나 B 소속 아베 히로키 외에는 아시아 국적 선수가 없다.

15. 논란거리



15.1. 보드진의 막장 행각


14/15 시즌 트레블 이후부터 보드진의 막장 행각이 점점 심해지는 중이다. 뎀벨레나 쿠티뉴 영입 당시 엄연히 판매자 입장인 상대 클럽에 대놓고 최후 통첩을 날리는 등 개무시를 하는 작태부터 시작해서 자기들을 챔스에서 물먹인 로마에게 보복한답시고 마우콩을 하이재킹해놓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추태를 보이는 등, 꾸레들 사이에선 보드진에 대한 불만이 예전부터 꽤 큰 편이었다. 그러다가 19/20 시즌엔 대놓고 축구판 빌런 자리를 꿰차려는건지, 클럽 내•외부적으로 오만가지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삽질을 해대며 꾸레 뿐만 아니라 타팀 팬들에게도 증오나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바르셀로나의 이미지는 끝간데 없이 추락했으며 경기력도 나빠지고, 팀에 헌신한 선수들은 함부로 내쳐지는 등 박대당해 그 리오넬 메시가 한때 이적 선언을 할 정도로 심각해졌는데, 보드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퇴는 없단 말만 부르짖으며 추악한 정치질과 변명, 뒷공작으로 일관하는 더러운 모습만 보이고 있다. 현재 바르셀로나를 좀먹는 가장 큰 문제이며, 이들이 계속 집권하면 바르셀로나가 AC밀란처럼 되는 것도 순식간이라며 한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 수장인 바르토메우는 선수들의 충성심과 구단을 향한 애정을 그저 여론몰이용 수단으로 이용해먹고, 위에 서술된 오만가지 추악한 짓거리를 저지르면서도 쉬쉬하고 내뱉은 말조차 지키지 않는 쓰레기같은 모습으로 일관하며 꾸레들의 증오와 경멸을 한 몸에 받고 있다.

15.2. 카탈루냐 독립 경우 따른 구단의 미래


FC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가 독립이 된다고 하더라도,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에는 계속 참여할 것임을 밝혔지만 스페인 축구협회에서는 카탈루냐가 독립할 경우 카탈루냐 소속 클럽들은 자동으로 라리가 퇴출이라 엄포를 놓았다.[89] 그러나 만에 하나 카탈루냐가 독립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스페인 측에서는 FC 바르셀로나의 참가를 반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2014년 이전 중계권료 임시 타협 이전 프리메라 리가는 각 구단별로 중계권료 협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엘 클라시코가 없어지더라도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중계권 수익이 급락하는거지 라요나 발렌시아 같은 구단들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각 구단의 중계권료 총액의 합이 얼마나 커지느냐는 라리가의 재정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중계권료 타협 이후 새로운 중계권 타협안에는 전체 계약 이후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라리가 전체 수익의 70%를 가져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바르셀로나가 퇴출된다면 라리가에 속해 있는 구단 모두에게 재정적 타격을 입히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단순히 중계권료 문제 뿐 아니라 다른 문제들도 라리가에겐 큰 타격으로 다가온다. 첫 째로 스타플레이어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스타플레이어의 영입은 비단 구단뿐 아니라 리그 전체의 수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가장 단적인 예로 EPL이 왜 인기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EPL은 각국 각지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모인다.[90] 가뜩이나 프리메라리가는 타국 선수들 영입도 적극적이지 않으며 중위권~하위권팀은 거의 대부분 스페인 선수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상황에 바르셀로나까지 사라진다면 바르셀로나의 스타 플레이어들은 이적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스타급 선수들의 이탈은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당장 네이마르가 PSG로 떠났을 때만해도 노발대발하던 프리메라리가 회장을 보면 이해가 가능하다. 두 번째로 리그 수준의 하락인데, 세리에, 분데스리가, 리그앙을 생각해보자 이들과 라리가의 차이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최강 수준의 클럽이 사라지고 경쟁자가 사라진다면 자연적으로 경쟁클럽들의 수준까지 떨어지기 마련이다. 프리메라리가 클럽들이 챔피언스리그나 유로파리그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이유가 바로 이 클럽들의 치열한 경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FC 바르셀로나 역시 치명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애초에 타국 리그에 편입되면 된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타국 리그에 편입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카탈루냐가 스페인 외에 그 어떤나라에 연고가 있다고 편입이 될 수 있겠는가? 카탈루냐 리그에서 뛴다고 해도 상황은 심각하다. 애초에 카탈루냐 리그에서 에이스급 선수들이 뛸 리가 없다. 메시 같은 타 국적 선수들이 남는다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며, 카탈루냐를 열렬히 사랑하는 피케 정도나 되어야 뛰지 않을까 싶다. 자연히 경쟁력은 폭락할 것이며 구단 수익도 바닥을 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스타급 선수들 주급도 제대로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축구 역사상 최고의 더비 매치인 엘 클라시코가 사라지는 것은 비단 중계권료건 뭐건 수익 문제뿐 아니라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컨텐츠가 사라지는 것'''이니 축구팬들 입장에선 정말 지옥같은 상황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챔스에서 만나면 되지 라고 말하는데 애초에 바르셀로나가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정리하자면, 카탈루냐가 독립하는건 정치적 문제는 말하지말고 단순히 축구라는 스포츠로 설명하자면, 프리메라리가, 바르셀로나 모두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입는 일이며, 더욱이 축구를 사랑하는 '''전 세계 모든 팬들에게도 치명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15.3. 파브레가스를 둘러싼 논란


국내 해외축구 커뮤니티에서 바르셀로나 팬과 아스날 팬이 싸운다면 99% 얘 때문인데 간략히 말해 바르사 팬들은 해적질이라는 주장을, 아스날 팬들은 문제없이 데려와서 우리가 키워서 쓴 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판단은 개개인에게 맡기겠다. 참고로 스페인 노동법은 17세 이하 근로계약을 금지하고 있어서 유스팀 선수들의 정식 프로 계약이 불가능하고, 잉글랜드 클럽들이 스페인과 이탈리아 클럽들의 유소년 선수들을 보상없이 데려가는 일이 빈번하자 UEFA 차원에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참고로 메시 역시 아스날의 감독인 아르센 뱅거가 매의 눈(...)으로 노렸는데 본인이 거절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 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얘기해보자면, 아스날 팬들은 바르셀로나에서도 남아메리카의 클럽들에게서 유망주 약탈을 자행하는 건 마찬가지라 주장하며,[91] 이쪽은 아예 가족 전부를 이민시키는 방식이라 선수가 프로계약에 실패하면 곧바로 온가족이 거리에 나앉는 처지가 된다고 주장. 하지만, 애시당초 올적에 바르셀로나에서 직업 알선을 해주기 때문에 순식간에 그지꼴로 나앉는 경우는 없다. 프로계약 실패한다고 아버지까지 짤리는 계약이 아니란 소리.
그러나 유럽의 한 시민단체의 EU 의회 제출 보고서에 따르면 직업을 알선받는다고 해도 구단과의 관계가 사라지면 쉽게 해고되기 때문에 길거리에 나앉는 사례가 상당히 많고 점점 유럽에서도 프로계약에 실패한 남미출신 유망주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팬들은 잉글랜드 클럽들은 스페인 이탈리아식의 완전 원석 빼오기 +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1차 가공한 원석도 빼가기까지 한다는 점을 공격. 그러나 '''잉글랜드 유스팀은 바르셀로나가 남미에서 데려오는 연령대의 유망주들은 클럽 연고지 주변에 살지 않는 이상 계약이 불가능하다.''' 데려오는 유망주들의 연령대가 높은 이유가 바르 그것때문. 뭐, 군소클럽 입장에서는 니들이나 쟤들이나 오십보 백보...긴 한데, 스몰클럽 입장에서는 여기나 저기나 자기네 유망주 유혹해서 데려가는건 똑같다. 물론 한국의 해외축구팬이야 99% 빅클럽들의 팬이니 니 잘못 내 잘못 앞으로도 죽어라 싸울 건 분명하다.
문제는 이 사건이 세스크 하나로 끝난게 아니라는 점. 2011년에 들어서도 아스날은 카데테 A의 유망주 욘 토랄을 빼갔고 이에 바르셀로나 회장 산드로 로셀은 격노해서 아스날을 까버렸다.[92] 최근에는 엑토르 베예린을 빼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2011년 실제로 아스날은 베예린을 데려갔다!
하지만 이는 세스크가 특이한 케이스일뿐이다. 바르사 유스 출신으로 타 팀에서 가능성과 재능을 보인 선수는 여럿 있지만 이 중에 월드 클래스로 성장해서 다시 바르사로 온 선수는 오직 세스크 뿐이다.[93] 반대로 그저 그런 선수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대표적인 예로 세스크와 비슷하게 바르사 유스에서 준수한 경력을 쌓고[94] 아스날로 이적했지만 성장이 더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95] 프란 메리다가 있다. 세스크에 비하면 존재감이 미미한 것은 사실이나, 아무도 이 선수의 DNA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선수 뿐 아니라 2011년에 빼간 욘 토랄의 경우도 아스날에서 여기저기 임대보내면서 성장을 유도하지만 막상 그만큼 성장하지 못하니 아스날에서는 데리고 있고 바르사에서는 전혀 관심없는 선수중에 하나다.
결론을 내기 위해 다시 세스크 건으로 돌아온다면, 바르셀로나가 세스크를 노린 이유는 단순하다. 그 정도 클래스의 선수를 (홈 디스카운트를 포함해) 비교적 낮은 이적료[96]로 데려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DNA운운한 것은 아스날에게 부담을 주기 위한 술책이지 실제로는 관심도 별로 없다는 얘기.
덤으로 2016년 엑토르 베예린이 정상급 풀백으로 주목받게 되자, 또 기사가 나왔다. "베예린, 바르사 DNA있다" 부회장이 관심 인정.

15.4. K리그 올스타와의 친선전


한국과 스페인 수교 6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2010년 8월 4일에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K리그 올스타 팀과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다. 문제는 이번에도 맨유 때 처럼 사전에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경기 날짜를 통보했고 프로연맹이 이를 받아들여 당일 리그 일정을(서울 vs 제주) 무산 시켰다는 것이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당사자인 FC 서울측은 처음에 바르셀로나가 경기 일자를 일방적으로 통보해오자, 자신들과 무관한 경기라고 맞섰지만 연맹의 리그 일정 무산 크리와 올스타전 카드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로 인해 일각에서 연맹과 바르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제기되었다.
그나마 이 경기에서도 스페인 선수들이 월드컵 휴가로 참여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예상하던 바였으나, 과르디올라 감독이 K리그 올스타전과의 경기에서 리오넬 메시, 다니엘 알베스까지 참가하지 않는다고 발언하면서 이제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감독 입장에서야 부상 위험이 있는 선수를 친선 경기에서 빼고 싶은건 당연하겠지만 엄연히 돈을 받고 뛰는 투어 경기에서 주축인 스페인 선수는 물론 메시까지 뛰게하지 않는다는 것은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다. 이전에 맨유도 리그 일정을 무산시키고 일방적으로 난입했지만 적어도 주전 선수들을 모두 출전시키며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의를 보여주었고 국내 언론을 대할때도 성실하게 임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할 리 없는 K리그 팬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바르셀로나와 연맹을 성토했다. 한바탕 논란끝에 메시의 출전은 확정되었지만 이는 거의 억지로 뛰게 만든것과 다름없으며 애초에 출전한다고 해서 제대로 뛸 지도 의문이고, 이미 바르셀로나에 대한 인식은 바닥을 쳤다.
어쨌건 이런 이유들로 인해 예매 취소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하며, 그로인해 주관사인 스포츠앤스토리는 이번 경기 주관으로 인한 적자를 넘어 '''부도'''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애초에 바르셀로나만 가지고 뭐라 할 것도 아닌 것이 애초에 계약 자체를 엉터리로 해놓은 통해 자업자득이라고 보는 상황이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 '경기 보러가지 말자'라든가,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가자'는 등의 여론이 들끓고 있으며, '루이스 피구 마킹이 된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가자'는 주장도 있었다.[97]123
배성재 캐스터의 경우 자신의 트위터에서 대놓고 바르사를 까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친선경기 중에 경기장에 꾸레가 난입하기도 했다. 난입한 사람은 본항목 중에 외부 링크로 연결된 그 사람. #1
이날 경기에는 FC 서울 한경기 관중보다 적은 고작 3만의 관중이 들어왔다. 분노한 K리그 팬들은 바르셀로나를 5-0으로 쳐바르자며 항전결의를 불태웠지만 경기에서는 '''바르셀로나 2.5군에게 2-5로 참패하면서''' K리그의 이미지는 이미지대로 까먹고 온갖 굴욕은 다 당한 '''K리그의 국치일'''이 되었다. 물론 원래 올스타 팀은 조직력이 떨어지기에 화려한 선수 구성과는 달리 실제 전력은 일반 클럽팀보다 떨어지지만 애초에 K리그를 까는 사람들이 그런걸 신경쓸리도 없고 해서 신나게 욕먹는 중.[98]
출전 문제로 논란이 되었던 메시는 고작 15분만 뛰어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 '''15분 동안 혼자서 두 골'''을 몰아치는 바람에 K리그 팬들은 벙쪄서 속만 끓이게 되었다.[99]
돈도 바치고 망신까지 당한 K리그의 완벽한 흑역사로 프로축구연맹이 이례적으로 사과글을 올리고 축구관련 기자, 칼럼니스트들이 K리그의 잔치가 비극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는등 일개 해외축구 클럽의 투어 이상의 심각한 사태가 되었다.
경기가 끝난 후 과르디올라는 한국 팬들을 생각해서 메시를 15분간 뛰게 했다, K리그의 수준에 놀랐다며 상처에 재를 뿌렸다. 그런데 중국에 가서 친선 축구를 할 때는 메시를 처음부터 뛰게 한다는 소식이 알려져 이미 바닥을 기던 바르사와 과르디올라 감독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다만 비행 시간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100] 거기다 메시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던 상태였고, 경기장을 빠져 나가면서 구토까지 했다.
메시의 인터뷰도 약간 과장된 감이 있다. 메시의 인터뷰에서 문제 되는 부분은

Q. 방한 소감은?

A. 공항에 오자마자 바르셀로나와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휴식을 잘 취해서 경기에 나서겠다.

Q. 시차 적응등 컨디션은 어떤가?

A. 지금 몇시인지 어딘지도 모르겠다. 최선을 다해서 연습을 통해 컨디션을 회복하겠다.

...였는데 이 때 메시는 친선경기, 아이티 자선 행사에 이어 바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와 인천공항에 내린 직후쯤이었던터라 빈말로도 컨디션이 좋다고 답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상식한 기자들은 그저 메시가 한국을 무시하느라 "여긴 어디? 시간 몇시?"이런 식으로 발언한 것만 강조해서 욕을 먹게했다.
또한 바르셀로나 10/11시즌 원정 유니폼을 입고 뛰었는데 이것이 한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하는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 까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알베스는 입국시 사진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욕을 먹어야 했으며 한국과 북한을 헷깔렸다는 루머가 돌면서 악성 해축빠들 사이에서 비호감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101]
여기에 과르디올라는 원래 선수단 관리에 있어서는 무리뉴 못지 않은 지독한 원칙주의자로 유명한데, 이 때 메시 출장에는 의료진의 OK 사인이 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원칙주의자인 펩은 당연히 출전시키지 않겠다고 대답했는데 이러한 소개 없이 메시를 출장시키지 않겠다는 발언만 부각시키면서 한국을 무시하는 이미지가 돼버렸다. 물론 계약이 있었던만큼 칭찬 받을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딱히 한국 무시와 관련있는 사항도 아니었다. 결국 처음부터 바르사 구단이나 팬들의 병크도 있었지만 이 정도로 욕을 먹을 것은 아니며 방한 태도 논란은 각종 언론사들의 농간 때문에 과장된 면이 크다.
이 친선전 이슈에서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어느 멍청하고 어리석은 꾸레가 정치적 색을 띈 내용을 담은 걸개를 걸겠다고 통보한 것'''에 있다. 심지어는 이를 옹호한 꾸레들까지 있었는데, 카탈루냐와 스페인의 정치문제는 타국에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역사적으로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다.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서 본인이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이런 한심한 사안을 옹호하기까지한 결과로 대한민국 꾸레들의 이미지는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게 되었다. 물론 대다수의 꾸레들은 이 걸개를 거는 것에 반대했지만 이미 추락해버린 이미지를 회복하기엔 더무니없이 부족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추태를 보다못한 사커라인 회원 몇명이 상암경기장과 외교통상부는 물론 스페인 대사관까지 연락해 걸개 압수에 나섰다.
그리고 2019년 K리그와 유벤투스 사이의 경기 때문에 나면서 이 경기가 재평가 받게 됐다.

15.4.1. 수원과의 친선전


[image]
이 경기를 단 한장으로 요약한 사진.
앞의 올스타전에 비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실 FC 바르셀로나는 그 전에도 한번 방한한 적이 있었다. 2004년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친선전이 그것인데 호나우딩요푸욜, 빅토르 발데스 골키퍼 등 주축 선수들이 모두 출전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후반 수원의 우르모프가 멋진 중거리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수원의 1:0 승리로 마무리 됐다'''.[102]
경기 결과도 결과지만, 사실 논란이 된 것은 정정당당하게 경기해서 승리를 따낸 수원 선수들을 향한 무개념한 바르셀로나빠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왜 타이트하게 경기를 해서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화려한 개인기를 못보게 하느냐? 라거나 어차피 골을 넣은 선수는 외국인 용병일 뿐, K리그가 잘 해서가 아니다. 와 같은 디스를 늘어놓았다.
이러한 무개념한 행동은 인터넷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경기 당일의 경기장에서도 행해졌는데, 특히 경기 후 수원 선수들을 향해서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경기장에 물병을 투척한 사건은 포토 에이전시인 Getty Images를 통해 전세계에 퍼져 나가며 그야말로 국제망신에 큰 공헌을 하였다.(...) 거기에다 바르셀로나 선수들도 경기 결과에 불만을 품고는 경기가 끝난 이후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경기장을 빠져나가면서 까일 거리를 제공했다. 경기 종료 이후 중앙선에서 상대팀 및 심판진과 악수하고 관중들에게 인사하는 게 관례인데 그냥 라커룸으로 갔다.
그리고 이 경기에 출장했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2018년 J리그 비셀 고베로 이적을 했다. 그리고 비셀 고베가 2019년 천황배에서 우승을 하면서 창단 첫 AFC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했고 수원 삼성과 한 조가 되었다. 이니에스타는 16년만에 수원을 방문했으며 '이 날의 경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고 말한 바 있었다. 경기 결과는 고베의 0:1 승리.

15.5. 유소년 영입에 관한 징계


바르셀로나가 18세 이하 선수 계약규정을 위반했다는 익명의 고발[103]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FIFA의 징계가 내려졌다. 규정을 위반한 선수들은 2016년 1월까지 등록이 불가능하며, 만 18세가 되기 전까지 공식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징계가 강화되어 훈련마저 금지. 공식전 출전 금지도 뼈아픈데 훈련마저 참가할 수 없다면 사실상 징계대상자들더러 바르셀로나를 떠나라고 요구하는 수준. 18세 이하의 선수가 해외 이적을 하려면 부모가 해당 유소년 선수와 함께 거주하며 축구 외의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데, 한국 선수들은 부모님과 함께 건너오지 않아 징계 대상자에 포함되었다.[104]
바르셀로나 구단 역시 2014년 4월 2일, FIFA에서 2014-15 시즌 이적 활동 금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또한 45만 스위스프랑(약 5억3천8백만 원)의 벌금과 문제가 된 10명의 유스 선수들에 대한 조치도 취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23일, 이적활동 금지가 1년간 유보되면서 징계에 앞서 유스보강이 가능해졌다.
라 마시아도 좋지만 경험이 무엇보다 소중한 유소년기에 이렇게 길고 엄격한 징계를 받아가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여러 유소년 선수가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되었다. 해프닝에 그쳤지만 장결희를 비롯한 다섯 명의 선수들과의 계약을 해지했다는 보도가 나온 적도 있었다. 그나마 만 18세를 넘은 백승호나 아직 18세가 되지는 않았으나 수원컵-칠레 U-17 월드컵 등의 일정에 모두 참가하면 실질적으로 한 달 정도만 버티면 되는 이승우의 경우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그보다 어린 다른 선수들에게 마냥 기다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일본의 유망주인 타케후사 쿠보의 경우 구단 내부적으로 12살 이하의 유스는 카탈루냐 태생만 받는다는 규칙이 있었음에도 가족이 바르셀로나로 이주한다는 조건으로 예외 취급을 해주며 입단시켰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만 18세가 되는 5년 후까지 훈련조차 참가하지 말라는 것은 축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되었다.

15.6. 주요 선수들의 탈세 논란


리오넬 메시가 탈세 혐의가 터진 뒤 계속 논란거리가 된 것을 시작으로 마스체라노네이마르 그리고 아드리아누 코헤이아까지 탈세 혐의로 고발되었고, 마스체라노19억원 탈세혐의를 인정하였고 탈세에 대한 처벌로 벌금 10억원형을선고받았다. 이제는 클라우디오 브라보까지 탈세 혐의를 받고 있다.[105]
최근 네이마르가 브라질 재무부에게 재산 573억원을 동결된 것에 이어 브라질 법원에게 유죄판결을 받아 벌금 589억원(!)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거기다 이러한 탈세 논란속에서 메시는 또 다른 탈세 논란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파나마의 회사를 이용해 재산을 숨긴 것으로, 기존에 진행되었던 것과는 별개의 혐의라고 한다. 더구나 앞선 탈세가 문제가 된 이후에 법정대리인을 바꾼 것이 문제의 모색 폰세카이고, 새로운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것은 스페인에서 한참 탈세 문제를 다루고 있던 도중이라고. 파나마 페이퍼즈 항목 참조.# 페이퍼 컴파니를 차릴 때 친필 사인이 스페인 언론에 의해서 공개되었다.
과거에 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던 사무엘 에투알렉시스 산체스 역시 탈세혐의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
2017년 6월 23일 스페인 대법원이 메시의 혐의사유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기존 21개월 징역형을 벌금형으로 대체했다.

15.7. #WeAreAllLeoMessi 캠페인 논란


[image]
리오넬 메시가 탈세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구단 웹사이트에 메시 지지 캠페인을 한 것이 논란이 됐다. 바르사는 구단 웹사이트를 통해 '#우리는 모두 메시다(WeAreAllLeoMessi)'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두 손을 펴고 있는 사진이나 메시지를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구단은 이같은 행위를 통해 메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 동정심을 보여주고 메시가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알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캠페인은 여러 축구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물론 메시가 경기 안팎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탈세 범죄가 명백히 드러난 만큼 무슨 지지를 보내냐는 의견도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탈세 범죄자가 아니라며 #WeAreNotLeoMessi라는 태그까지 등장했다. 구단 측은 아직 비판에 대해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 기사
구단의 대표 선수가 논란에 휩싸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WeAreAllLeoMessi 캠페인은 클럽과 선수를 위해 행한 캠페인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무모하고 앞뒤가 없는 뜬금없는 캠페인이었다.''' 팬과 클럽, 구단, 선수 모두가 힘든 시기인 것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행했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생각하면 후폭풍을 예상할 수 있을 캠페인이다. 한 구단이 선수와의 대화도 한마디 없이 행한 이 캠페인은 물의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16. 둘러보기










'''FC 바르셀로나 산하 스포츠단'''[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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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엉덩이(Culo)를 내밀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이는 과거 바르셀로나 홈구장 담벼락에 걸터앉아 경기를 구경하던 사람들의 엉덩이가 지나가던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카탈루냐어로는 Culers /kuˈlɛs/(쿨레스)라고 발음한다. 비록 애칭이지만 한국에서는 어감이 좋지 않다 보니 거의 욕처럼 쓰이고 있다. 과 비슷한 느낌이며, 네이버 스포츠 댓글란에선 한때 이 말을 필터링했던 적이 있었다.[2] 시민구단이기 때문에 구단주는 없고, 소시오 중에서 회장이 선출되는 방식이다.[3] 3주장은 제라르 피케 4주장은 세르지 로베르토[4] SPOTV가 라리가 중계권을 구매하면서 SPOTV MALL을 통한 유니폼 공식 대행 판매 자격까지 함께 구매했다.[5]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의 전신.[6] 스페인의 리그컵. 대회 포화 등 클럽들의 반발로 4년 하고 바로 폐지되었다.[7] 2020-21 시즌 정식 선거 직전까지 임시 회장직[8] 각 대회 별 전체 통산 기록이 아닌 FC 바르셀로나 통산 기록, 볼드체 표시는 해당 대회 / 분야 신기록[9] 2009년에, 라리가 (2008-09 시즌), 코파 델 레이 (2008-09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2008-09 시즌), UEFA 슈퍼컵 (2009 시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9 시즌), FIFA 클럽 월드컵 (2009 시즌)[10] 2008-09, 2014-15 시즌[11] 특히 2014-15 시즌 트레블은 UEFA 랭킹 1위 리그에서 나온 유일한 트레블이다.[12] 다만 2019-20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도 2번째 트레블과 한 해 6관왕을 달성해내면서 유럽 유일의 2회 트레블과 한 해 6관왕 기록은 깨지게 되었다.[13] ‘바르사’로 발음할 때 ‘ㅡ’ 뒤에 ‘ㅏ’를 연이어 발음하는 것보다, ‘바르샤’로 발음할때 ‘ㅡ’뒤에 반모음 ‘ㅣ’를 거쳐가는 ‘ㅑ’ 로 발음하는 게 모음구조 상 더 편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ç는 겹모음을 포함하는 단어도 아니고 한글의 시옷 내지 쌍시옷과 유사한 발음이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바르셀로나를 바르샤라고 부르면 스페인어 화자들은 그것이 바르셀로나를 지칭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14] 리오넬 메시 -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 차비 에르난데스 - 세르지오 부스케츠 - 제라르 피케 - 카를레스 푸욜 - 빅토르 발데스로 이어지는 팀의 척추가 싹 다 라 마시아 데 칸 플라네스 출신이다. 세스크 파브레가스페드로 로드리게스 같은 백업 멤버도 라 마시아 출신.[15] 이는 카탈루냐어이며, 스페인어로는 'Más que un club'에 해당한다. 모토의 뜻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클럽 그 이상의 클럽: '다른 축구 구단들보다 우위에 있는 구단'이라는 식으로 이상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문의 뜻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일반적인 축구 클럽을 벗어나서, 다른 사회적인 분야에서도 모범적이며, 상징적인 존재가 되는 클럽을 지향하자'라는 뜻이다. 실제로 많은 카탈루냐 인들에게 FC 바르셀로나는 단순한 축구 클럽을 넘어 하나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16] 한스 캄퍼(Hans Kamper). 초기 클럽을 만들 때 회장은 카탈루냐 식으로 이름을 등록했기 때문에 조안 감페르(Joan Gamper)라는 카탈루냐식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 이름은 일반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읽어서 조안 캄페르가 되기도 하고, 호안 감페르가 되기도 하고, 호안 캄페르가 되기도 한다. 다만 이게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활용하기 의도인 것은 확실하지만 정말로 카탈루냐에 동화되어서 그렇다고 보기는 애매한 것이 초대 회장인 영국인 월터 와일드 역시 회장 등록은 카탈루냐 세례명인 구얄테리라는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와일드도 애정이 넘쳐서 그런 것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와일드는 임기 끝난 다음에 영국으로 도로 돌아갔다. 이 문서에서는 카탈루냐식으로 조안 감페르로 기록한다.[17] 바르셀로나 창립 멤버 12명 중 6명이 외국인이었다. 초대 회장은 영국인, 주도자는 스위스인, 이사는 독일인에 네덜란드인도 2명도 끼어 있었다. 반면 우습게도 레알 마드리드의 실질적 창립을 주도한 후안 파드로스는 '''바르셀로나 출생의 카탈루냐인'''이다.[18] 조안 감페르는 FC 바젤의 주장을 역임했다. 동시에 취리히에서도 창립멤버로 뛰었기 때문에 SVB 엑셀시오르에서 따온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19] 여담으로 해당 로고는 Forest Green Rovers라는 구단에서 비슷하게 사용하다 2011년부터 변경해서 쓰고 있다.[20] 참고로 농구팀인 FC Barcelona Bàsquet(바스켓)팀은 스페인 프로농구리그 Liga ACB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이은 우승 횟수 2위 팀이다.[21] 라 마시아 = 단어 자체는 '농장'이라는 뜻이지만 클럽의 훈련 시설 및 유스 아카데미를 지칭한다.[22] 사실 이 부분에는 비화가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레알과 바르셀로나 사이에서 복잡한 이적 진통을 겪었고 결국 레알 입성이 확정되면서 1950년대 마드리드의 전성기를 연다. 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이적도 프랑코 독재 드립만큼이나 레알과 바르셀로나 사이의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있을 정도.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이후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의 영입을 하면서 이런 상황이 재개될 것을 우려해 농기계로 등록해서 영입을 하게 되었다.[23] 하지만 이 이적료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너무 쓸모없이 이적료를 낭비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 문제이다. 저기서 당시엔 괜찮은 영입이라 평가했던 즐라탄, 비야 등은 전술 사정상 전 소속팀에 비해 약간 부족한 활약을 하였고 네이마르는 메시가 재계약 이전에는 메시보다 주급을 많이 받는 것이 알려져 문제가 되었고 엔리케, 카세레스, 케이리송, 치그린스키는 아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헐값으로 재이적하거나 임대를 전전하다 바르셀로나가 계약 만료로 선수를 풀어주는 경우가 대다수여서 바르셀로나가 유스는 잘 키우지만 영입은 그다지이라는 이미지가 생기게 되었다.[24] 이는 즐라탄의 이적건과 함께 라포르타계와 로셀계의 정치 싸움이라는 의견이 많다.[25] 베르더 브레멘의 메수트 외질 이적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외질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26] 유소년 유망주 독점을 막기 위하여 일정 연령 미만의 유소년 영입 시 부모와 함께 거주하며 부모가 축구와 관계가 없는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27] 결과적으론 실패한 영입이 되고 말았다.[28] 단, 알 수 없는 영입이 되어버린 더글라스와 부상 때문에 시즌 중반이 되도록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있는 토마스 베르마엘렌도 영입된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29] 네이마르 주니오르가 떠나고 지난 시즌 영입한 안드레 고메스 등의 실패로 현재 바르셀로나는 매우 다급한 상황이었으나, 마땅히 영입할 매물도 없었으며, 또한 네이마르 주니오르 이적으로 일시불로 얻게 된 두둑한 현금이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알아버리는 바람에, 해당 선수의 가치보다 많은 돈을 주고 영입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30] 실례로 많은 인재들이 맨체스터 시티 FC가 만수르에 인수된 이후 그쪽으로 이동하였다.[31] FIFA 규정상 계약기간이 6개월 이상 남은 선수와는 다른 구단이 직접 접촉해서는 안된다. 앙투안 그리즈만의 경우나 루카스 리마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제소한 케이스이며, 파울리뉴 때도 접촉했다고 주장하며 광저우 헝다가 제소하기도 했었다.[32]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시 네이마르 주니오르가 이적시장 종료를 앞두고 이적해버렸고 쿠티뉴는 이미 5년 재계약을 한 상태라 누가 보아도 급한 쪽은 바르셀로나였으며, 네이마르 주니오르의 판매 금액으로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모두 아는 상황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 거기다 리버풀은 처음부터 끝까지 NFS을 선언했는데 이런 무리한 조항을 가지고 자기 맘대로 최후통첩을 넣었다. 당연히 리버풀은 얼척이 없어서 거절했는데, 바르셀로나는 최후통첩이 거절당했는데도 4번째 이적 제의를 넣었다.[33] 그 금액이 지나치게 높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여름에 이러한 갑질로 리버풀과의 관계가 폭망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러한 금액은 바르셀로나의 화해의 제스쳐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34] 그 중 한 경기는 무패 우승을 앞둔 2017-18 시즌 바르사의 유일한 라리가 패배 경기였으며, 5실점에 크게 관여했다.[35] 몰론 예리 미나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중앙 수비수임에도 3골을 넣은 준수한 활약을 보였던 배경이 있었으며, 묶여서 왔다고 볼 수 있는 안드레 고메스는 원금보다 낮은 가격에 보내줬다.[36] 참고로 아르투르는 바르셀로나에 남아 레전드가 되고 싶다고 했으며 그당시 나이도 24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퍄니치는 30살이었다. [37] 사실 페드리는 2019-20 시즌 바르셀로나 B 소속으로 영입한 뒤 임대를 떠났다.[38] 유니세프에 한해서는 지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단 차원에서 후원한다.[39] 바르셀로나의 역대 주장이자 역대 감독이었으며 한 명의 위대한 축구선수 였던 요한 크루이프가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유니폼 번호 였던 14번과 Gràcies Johan'('감사해요 요한')이라는 카드 섹션을 엘 클라시코 열리는 캄프 누에서 행하였다. 다만 바르셀로나에선 9번을 달았다는게 함정.[40] Coral은 스페인어로 여성 명사로 합창대나 성가대를 뜻하고, 위의 소개에 서술되어 있듯이 sant Jordi는 카탈루냐어로 "성 게오르기우스"를 의미하고 있으니 성 게오르기우스 성가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41] Canto라고도 할 수 있고 Cant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남성명사와 여성 명사의 차이다.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FC 바르셀로나 공식 유튜브에서는 Cant del Barça로 칭하고 있다.[42] 각 대회 별 전체 통산 기록이 아닌 FC 바르셀로나 통산 기록, 볼드체 표시는 해당 대회 / 분야 신기록[43] 프랑스 풋볼 발롱도르 & FIFA 발롱도르 모두 포함[44] 세스크 역시 기대치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13/14 시즌 종료 후 다시 첼시로 이적한다.[45] 밀란과의 16강전 2차전에서 대역전승을 일구고 8강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메시 의존증은 결국 해소되지 않았다. 파리 생제르망 FC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는 메시가 들어가기 전까지의 바르사의 경기력은 안습한 수준이었고 선제골까지 먹힌 후 후반 61분 급하게 메시를 투입하고 나서야 경기력이 안정되며 동점골을 넣을 수 있었다.[46] 부상 재발 위험이 커서 감독도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안 넣으려했다고 하고, 메시 본인마저 위험한 도박이라 할 정도로 메시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그를 넣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메시가 없을 때 바르사의 경기력이 급격히 나빠지는 것과 산체스 등 다른 공격수들의 결정력이 12/13 시즌 매우 좋지않다는 점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였다. 이 때는 메시 원맨팀이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47] 그리고 이 모순점들이 대폭발한 것이 바이에른 뮌헨과의 4강. 1-2차전 합계 도합 7-0으로 참패하면서 상술된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바르셀로나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수비진의 삽질 외에도 공격수들의 결정력 부족까지 도마에 올라 이적시장에서 공격수의 보강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48] 사실상 오른쪽 미드필더였다.[49] 물론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트로피를 들어올렸지만 트레블에 관한 트로피만을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50] 챔피언스 리그 4강 리버풀 FC 전에서의 패배가 너무 커서 그렇지 라리가 우승, 챔피언스 리그 4강, 코파 델 레이 준우승으로 결과 자체만 보면 아쉬울 법 하긴 하지만 그렇게 나쁜 결과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51] 실제로 이에 따른 넓은 뒷공간은 그야말로 점유율 축구의 최악의 단점으로 꼽히고 있다. 역습 축구에 약한 것은 물론이고 골키퍼가 이 뒷공간을 커버하기 위해 높은 집중력을 유지한 채로 뛰어다녀야 하기 때문에 골키퍼 실책에 의한 실점 가능성도 당연히 높아진다.[52] 1, 2차전에서 골대를 5번 가까이 맞췄다.[53] FIFA 클럽 월드컵에서 정강이 뼈가 부러졌다.[54] 여기에 티토 빌라노바 감독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는 점'''이 바르사의 또 다른 패인이 되었다. 빌라노바 감독과 로우라 수석 코치간의 역량 차이는 엄청났기 때문이다.[55] 09/10 챔스 4강에서 주세페 메아차에서 1경기가 있었는데 하필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인해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를 버스로 가는 말도 안되는 강행군을 하는 바람에 바르셀로나의 컨디션 조절이 어려웠 것을 지적하는 요소...긴 하나 인테르의 조직력이 원체 좋았다.[56] 축구에서 위협적인 윙을 막는 방법으로, '풀백을 전진시켜 윙으로 하여금 수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 알베스와 리베리,알바와 로벤이 이 반대의 예를 완벽하게 보여준 것이다.[57] 사실 이 양반은 키만 컸지 공중볼 다툼에 능하지는 않다. 차라리 중앙 수비수로는 루저 중 루저에 속하는 푸욜이 공중볼에는 훨씬 강하다.[58] 바르셀로나는 아니지만 06 월드컵 조별히그에서 그렇게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던 스페인이 16강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한 경기도 이 관점에서 볼 때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이니에스타와 메시가 없이 차비 에르난데스, 샤비 알론소, 파브레가스로 이뤄진 중원이었지만 지단, 마케렐레, 비에이라라는 무식한 피지컬에 준수한 테크닉의 3미들, 사뇰과 아비달이라는 우월한 풀백, 거기에 말루다와 리베리라는 빠르고 테크니컬한 윙플레이어들까지 말이다.[59] 과르디올라는 케이타를 정말 신임하며 많은 출장기회를 주곤 했다.[60] 상대편 중원 및 중앙수비진이 바르셀로나에 대항할 만한 테크닉 + 활동량에 바르셀로나를 압도하는 피지컬을 갖춘 조합을 가지고 있으면서 바르셀로나전에 문제없이 가동시킨다는 건 너무 어려운 조건이다. 모든 구성원이 모든 조건을 갖춘 게 아니라 하나 둘씩 결함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61] 대표적으로 부스케츠의 탈장[62] 12-13시즌 당시 사비는 33세,이니에스타는 29세의 나이로 사비는 이미 기량이 상당부분 하락했고, 이니에스타도 기량이 한풀 꺾일즈음이었다.[63] 이런 상황에서 리그우승,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일궈낸 탓에 혼자서 팀을 이끈 메시가 기어이 발롱도르까지 수상해버렸다.[64] 물론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프리메라 리가는 당연히 진행이 중단되었다. 나라 전체가 전쟁중인데 축구 리그를 진행할 정신이 있을리가 없다.[65] 일단은 프랑코 세력이라고 추정하긴 하는데, 스페인 내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서 누가 죽였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일단은 프랑코 세력이라는 것이 정설이다.[66] 원래는 여기에 좌익 성향도 더해져야 하지만,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주의 패배가 확실해진 이후로 그런 드립 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67] 단적으로 바르셀로나의 2대 회장이자 최초의 카탈루냐인 회장인 바르톨로메우 테라다스는 카탈루냐 축구협회장도 겸임하면서 사재를 동원해서 '''RCD 에스파뇰의 창단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68] 다만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는 좀 많이 골 때린다. 애초에 스페인 내전 자체가 골 때리지만, 특히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 내전까지 겪으면서 난리를 쳤다. 때문에 이 시기를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발로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이다. 진짜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바스크 지역은 대놓고 왕따를 자처해서 남부와는 아무런 연대도 하지 않다가 각개격파되었다. 반면 바르셀로나는 조지 오웰카탈로니아 찬가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합집산의 극한을 보여줬다.[69] 바스크를 제외한 것은 프랑코 이전에도 바스크는 저항 세력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프랑코가 무너지게 된 것은 ETA를 비롯한 바스크 세력의 저항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다. FC 바르셀로나는 그에 비하면 영향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이다.[70] CF 레알 마드리드의 그 CF이기 때문에 레알 따라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71] 혹은 귀족명 라 메사데아스타 후작.[72] 프랑코 정권의 비호를 전면 부인하는 것을 어려우나 실제로 21년 무관까지 겪은 레알 마드리드가 잘 나가기 시작한 것은 프랑코보다는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활약이었으며, 스페인 내전 발발 시기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었던 라파엘 산체스 게라는 대표적인 공화주의자라서 프랑코의 정적이었고 내전 이후 감옥살이(원래는 사형선고 였으나 내전중에 공화국 지역의 우익들을 숨겨줘서 사형은 면하고 종신형이 선고 되었다)를 겪고 훗날 프랑스로 탈출했다가 다시 59년도에 돌아와서 64년도에 사망했다. 부회장과 재무 담당자도 같이 죽었고, 후임인 후안 호세 바예호와 안토니오 오르테가 역시 레알 마드리드 역사에 이름도 올리지 못했다. 특히 안토니오 오르테가는 이쪽도 바르셀로나의 수뇰 같은 공화주의 좌파라서(공화군 소령이었다) 내전 이후 군사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했다. 참고로 수뇰의 시체가 발견되는데는 50년의 세월과 '수뇰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의 카탈루냐 민족주의 단체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했다. 프랑코 독재가 가장 심했던 초기 시기 동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런던으로 도망쳐서 변호사 생활을 해야 했다.[73] 그런데 이게 진짜로 이 시기에도 심각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는 것이, 이 시기를 대표한 바르셀로나 선수라고 한다면 바르셀로나 골수팬들 중에서 일부는 요한 크루이프보다도 사랑한다는 라슬로 쿠발라를 들어야 할 것인데, 쿠발라는 만년을 왕년의 라이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에스파뇰에서 보냈다. 그리고 쿠발라는 에스파뇰에서 선수 말년을 보낸 것과 별 상관없이 바르셀로나의 감독직을 지내기도 했다. 이 시기 레알과의 라이벌 의식이 진짜로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민족주의 의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바르셀로나가 이 시기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권을 넘겨준 영향인지는 좀 심각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74]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고려를 해야할 것은 바르셀로나와 에스파뇰의 관계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카탈루냐의 카스티야에 대한 감정은 역사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쿠발라의 일화로만 이를 유추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여지가 있다. 반대의 예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경우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로 남았으나 그의 영입 과정에서부터 레알 마드리드와의 대립이 있었다. 바르셀로나가 먼저 접근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의 개입으로 공유(...)를 하게 되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바르셀로나측이 이를 포기하면서 그는 레알 마드리드로 넘어가게 되었다.[75] 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사건 이전이긴 하지만 주셉 사마르티노 같은 인물은 선수와 코칭스태프, 그리고 프런트 생활을 모두 레알과 바르셀로나를 오가면서 하기도 했다. 바르셀로나 선수 - 레알 선수 - 바르셀로나 코치 - 레알코치 - 바르셀로나 이사 뭐 이런 식으로 살았다. 그래서 별명이 '''왕복 비행기'''였다.[76]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에서 모두 뛴 선수 누구? [77] 당시 주장은 전 바르셀로나 감독이었고 현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78] 2016년 여름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한 헤세 로드리게스에게도 이 조항이 적용되어 있다.[79] 물론 경기 전에는 서로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고 격려도 하지만 2010년도의 5-0 대승 당시에 라모스가 돌아버려 메시와 푸욜, 챠비 에르난데스를 밟고 때렸던 것처럼 승부에서 지면 난폭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80] 반면 잉글랜드의 경우 국대에서마저 라이벌 의식이 매우 뿌리깊게 박혀있는 탓에(피엘 중원 삼대장으로도 불렸던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 폴 스콜스 셋은 이때문에 최악의 케미를 보여줬다) 가레스 사우스게이트의 지휘로 4강에 진출하기 전까진 월드컵에서 매우 안습이었다. 참고로 러시아 월드컵 당시 주전선수들 중 아스날 FC 소속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 덕분에 해리 케인이 주장으로서 제대로 팀을 이끌었을수도...[81]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1900년 바르셀로나 대학교 공대생 앙헬 로드리게스 루이스가 창설했다.[82] 1978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크루이프의 불참으로 네덜란드가 고전할 거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의외로 네스켄스가 크루이프의 역할을 충실히 잘 해주었다. 이 대회는 축구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교과서적인 대회였었고, 일방적인 편파판정에 대한 의혹과, 2차 토너먼트의 조 구성에 대해 말도 많았던 대회이다.[83] 요한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에서 전설적인 존재이다. 현재 선수들이 보여줬던 입담과는 차원이 다른 말들로 레알 마드리드를 탈탈 털어왔는데, 입단과 동시에 레알 마드리드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독재자의 팀이라서"라는 말과, 이적 후 첫 엘 클라시코에서 5:0이라는 스코어를 기록한다. 또한 크루이프의 아들 요르디 크루이프는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의 이름에서 따왔다.[84] 스페인 내전이 종결된 해. 1939년 1월에 스페인 제2공화국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바르셀로나가 함락되면서 종결되었다.[85] 99-00 레알 마드리드, 01-02 레알 마드리드, 07-0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09-10 인테르, 11-12 첼시, 12-13 바이에른 뮌헨, 18-19 리버풀, 19-20 바이에른 뮌헨[86] 또한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서 어느 팀이 바르셀로나에게 탈락한다면, 그 시즌은 무조건 바르셀로나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즉, 결승전에 갔다하면 우승한다는 것이다.[87] 어머니가 필리핀 국적, 아버지가 스페인 국적이었다.[88] 이중 유일하게 바르셀로나에서 방출이 아닌 임대 시키려고 했던 선수가 이승우인데 결국 베로나로 이적하자 바이백 조항을 걸어두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확률도 있었으나 바르셀로나에서 바이백 조항을 포기해버렸다.[89] 가끔 카탈루냐의 부유한 재정이 카탈루냐 리그를 단독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엄연히 스페인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상황이기에 가능한 것이며, 애초에 카탈루냐 리그가 프리메라 리가만큼 경쟁력이 뛰어날리도 만무하며, 애초에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므로 애당초 말이 안되는 소리다.[90]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이집트 국가대표, 벨기에 국가대표 등등 전 세계의 수퍼스타들이 모이기 때문에 중계권료가 높을 수 밖에 없다.[91] 애초에 브라질에서 18세 미만의 축구선수의 이적을 포르투갈을 제외한 유럽으로 금지시키는 법안인 펠레법이 나온것 자체가 스페인 클럽들이 브라질 유망주들을 대량으로 데려가서 프로계약에 실패해 유럽에서 하류층으로 전락한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다.[92] 욘토랄을 빼간 것은 임모랄이라면서 라임을 맞추면서 까지 깠다.[93] 피케도 거론할 수 있겠지만 피케의 경우는 맨유에서 그다지 많은 기회를 받지 못해서 애매한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94] 스페인 U-17 대표팀부터 U-21 대표팀까지 꾸준히 발탁된 경력이 있다.[95] 24경기 1골 1어시에 그치며 자유계약임에도 최악의 영입에 꼽히며 현재는 SC 브라가로 임대가 있음.[96] 깎고 깎았는데도, 앤디 캐롤과 동급의 이적료다(...)[97] 피구는 바르셀로나에서 뛰다가 레알로 이적했으며, 이적 당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르셀로나에 계속 남겠다고 발언했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컸다(...). 바르사 팬들에게는 두고두고 까이는 선수.[98] 역시 2군과 어린 선수들로 구성된 맨유가 MLS 올스타를 5-2로 바르고, 1군이 포함된 맨유가 아일랜드 올스타를 7-1로 바르는 등 올스타팀의 실제 전력은 그다지 높지 않다.[99] 메시, 즐라탄, 알베스 등은 전반에만 잠깐 뛰었고, 그나마 이때는 K리그 올스타가 두 골이라도 넣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의 유소년들'''만이 출전한 후반에는 0-2로 완벽하게 압살당했다.[100] 물론 다른 클럽과 비교되기는 하지만 이 해에는 시즌 오프 기간에 월드컵이 있었고, 메시는 아르헨티나에서 친선경기를 뛰고 스페인에 도착한 뒤 바로 비행기로 한국까지 왔다. 돈 받고 15분 뛴거야 화날만 하지만 메시가 공항에서 "솔직히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라는 발언은 정말 피곤해서 나온 말일 가능성이 크다.[101] 사인을 해주지 않고 지나갔다거나, 거만하게 팬들을 무시했다는 건 죄다 헛소문이다. 버젓이 알베스에게 사인을 받고 같이 사진찍은 사람들도 있다.[102] 물론 바르셀로나는 시차 적응이나 어웨이 경기의 불리한 점이 있었다고 말하나 따지고 보자면 수원에 비교해 선수단의 몸값이 다르다. K리그에서 강호에 속하는 수원 선수단의 연봉을 다 합쳐도 호나우지뉴 한 명의 연봉에 비할바 아니였으니... 게다가 당시 수원은 이운재를 비롯한 국가대표 선수들이 차출로 인해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상태였다.[103] 스페인의 스포츠지 문도 데포르티보에 따르면 익명의 고발자가 한국의 축구협회 소속인물일 가능성도 크다고 한다. 축구하는 자식을 둔 축협 임원이 청소년 대표팀에서 자기 자식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막기위해서 수작을 부린 것이라는 소문이었으나, 결국 소문일 뿐 사실여부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104] 바르셀로나 유스출신인 리오넬 메시의 부모님도 클럽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페인으로 직장을 옮겼던 적이 있다.[105] 이 사람은 레알 소시에다드 시절에 탈세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106] FC가 말 그대로 축구팀이라는 뜻인데도 다른 종목팀들도 FC 바르셀로나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 왜냐하면 축구단이 주체가 되어 창단한 팀들이기 때문이라 기업으로 따지면 축구단이 모기업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다른 팀에 들어간 FC는 Football Club이라 해석하지 말고 FC 바르셀로나라는 이름 전체를 고유명사로 취급해야 한다. 이런식으로 구성된 팀들이 유럽에 꽤 많다. 야구도 한때 디비시온 데 오노르의 CB 바르셀로나 라는 구단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2011년에 독립하였다.